진정한 나는 무엇일까.
A는 항상 문을 열고 나가야 하는 저주에 걸렸다.
A는 아침에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갔다. 화장실이 나타났다. 세수를 했다. 머리를 감았다. 들어온 문은 그새 사라지고 반대쪽 방향의 문이 생겼다. 문을 열고 나갔다. 다시 방이 나타났다.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었다. 마음에 드는 옷을 다 꺼내고 옷 장 뒤쪽 문을 열고 나갔다. '밖'이라는 공간이 나왔다. 밖이라는 개념 속에도, 밖이라는 공간에서도 A는 하나의 문만을 찾을 수 있었다. 길고 긴 길을 걸어 문을 열고 나갔다. 회사가 나왔다. 그렇게 A는 항상 문을 열고 나가는 저주에 걸린 채 살아간다.
A에게 2개의 문이 생기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결핍의 공간. A가 배고플 때, 또는 A가 너무 피곤할 때, A가 너무 괴로울 때, A가 너무 슬플 때 결핍의 공간에서 문이 2개가 나타났다. 때로는 3개, 때로는 4개. A는 배고플 때 폭식을 할 수 있다. 그런 문이 있다. A는 적당한 식사를 할 수 있다. 그런 문이 있다. A는 식사를 굶고 간헐적 단식 따위 같은 것을 고를 수도 있다. 그런 문도 있다. A는 결핍의 문이 가장 괴롭다. 작은 선택이 그의 운명을 바꾸는 기분이다. 너무나 괴로울 때가 그에게도 있었다. 그가 너무 괴롭고 슬플 때 결핍의 공간이 찾아왔다. 그에게 즉각적으로 기분을 좋게 하는 문이 있다. 그의 폭력성을 발휘할 수 있는, 남을 때리고, 공간을 부수고 사회적 질서를 어지를 수 있는 방에서 그는 기분을 해소할 수 있다. 그 공간을 나가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또는 괴로움을 안고 그저 새로운 일상으로 돌아가는 문을 선택할 수 있다. 그는 그럴 때 더욱 괴로움을 느낀다.
결핍이 있는 내가 나일까. 결핍을 어떻게든 풀어버리면 그 전으로 돌아올 수 없다. 배가 너무 고픈 순간 못된 불량한 음식들을 입에 처 넣은 다음에는, 나는 다시 선택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 순간을 견디고 좋은 음식을 찾아 먹는 나로 돌아갈 수 없었다. 너무나 괴로울 때 소중한 사람을 버렸다. 그렇게 해소한 다음에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화가 나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른 다음에는, 다시 화가 난 순간으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다. 나는 이미 선택을 했고, 그 기분을 빠져나왔다. 다시 그 기분으로 갈 수 없다. 욕망을 해소한 뒤에 다시 그 욕망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그 선택을 다시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아니 그 기분을 느낄 수 조차 없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을 때, 그 때도 나는 잘못된 선택을 다시 하지 않지 않겠다고 다짐할 수 없다. 왜냐면 나는 그 기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나는 결핍의 나다. 결핍을 해결하고 나서,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선 내가 놓친 진정한 나를 후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