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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tine sk Mardres Nov 07. 2023

#14 20231106

어쩌다 샌디에이고 Ep.1

지난 두 달간 정신없는 날의 연속에 몇 시간 조용히 혼자 책을 읽거나 글을 끄적거리거나 할 여유가 나지 않았다. 이사 후 정리도 정리지만 최대 6개월짜리 관광비자가 또 만료 되어 가는 가운데, 신청한 지 1년 반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인 캐나다 영주권 발급 행정 절차와 시간, 비용에 분노하며 30분 넘게 응답대기음을 감내한 후 들은 소리는 참으로 뇌가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울화통 터지게 했다.


천 삼백 달러가량 지불했다는 정부 발급 영수증도 있는데 제출한 서류는 처리 시스템에 문서번호도 생성되지 않았고 검색되지도 않는다고 했다. 전화 상담원에게 차마 화를 낼 수는 없고, 관련 부서 담당자 전화번호 요구 하니 그런 거 없다는 소리만 들었다. 20년간 한국에서 살다 온 캐나다인 남편은 한국의 행정 민원서류 처리가 얼마나 신속 한지 알기에 더 분통 터져하며 동시에 민망해했다.


향후 며칠간 민원처리 불만족 메일을 몇 통 보내고 의회 소속 지역 정치인에게까지 이런 어처구니없는 행정 실무력으로 입은 피해와 가족 중 유일한 이민 예정자가 처한 암담한 현실에 대해 지난 20년간 한국에서 원어민 영작문 첨삭 지도 경험을 과하게 살려 민원 읍소 이메일을 보낸 결과 이제 드디어 사건 담당 번호가 생겼다. 지난 1년 6개월의 기다림이 공중 분산되는걸 피부로 느끼는 건 참 속이 쓰리지만 그래도 이제 영주권 획득은 끝이 보이는 여정이라 생각하니 마음에 여유도 생겼다.


앞으로 당분간 6개월에 한 번 나 홀로 여행각이다. 일단 한국행 왕복표를 검색하니 입이 확 말라버렸다. 대신에, 가지고 있던 한국행 편도 티켓을 6개월 후로 미루고 몇 년간 왕래가 없어서 소식이 궁금한 캘리포니아 지인 방문을 성사시켰다. 오랜 친구들, 가족들과 한국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깨게 되어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지만 시차가 1시간 밖에 안 나서 시차 적응 따위는 필요 없는 햇살 가득 캘리포니아에서의 일주일로 유혹하는 최저가 비행기표에는 그저 굴복할 수밖에 없다.


 샌디에이고 공항을 나서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야자수의 행렬에 작년 4월 제주공항에서의 감흥이 떠올랐다. 그때도 최저가 티켓이라 거의 한 밤중에 숙소에 도착했었다. 연쇄지인민폐범이지만 유쾌하고 반갑게 맞아주는 지인과 몇 년 조기 퇴직하고 유럽 여행을 진지하게 꿈꾸며 영어 공부 차 같이 지낸다는 전직 중학교 수학 선생님이신 언니 분과 내일부터는 영어로 대화하자고 하고 폭풍 수다를 주고받았다.


4명이 같이 지내기엔 샌디에이고 방 두 개짜리 아파트가 불편할까 봐 마음 써 주셔서 다시금 청춘들로 들끓는 샌디에이고 한복판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이번 미국행에 같이 할 나의 첫 e유심이 활성화되지 않아 처음부터 다시 해 볼 요량으로 컴퓨터와 핸드폰을 나란히 두고 해야 할 작업을 핸드폰 한 대로 미약한 숙소 와이파이 신호를  버팀목 삼아 혼신의 힘을 다해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그제야 주변이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게스트하우스 6인실 숙소에 나 빼고 한 명밖에 없는 행운에 감사하며, 백 년은 거뜬히 넘어 보이는 멋스러운 히피 천국 게스트 하우스 소파에서 캐나다에서 가지고 온 오트밀 에너지바를 우적우적 씹으며 파리 대왕을 꺼내 들었다. 이제 중2, 초5 두 명이 앞으로 저지를 어떤 만행도 파리 대왕 속 아이들을 떠올리면 새발의 피일터다.


새벽 두 시가 넘어 피곤한 가운데 의식은 또렷하고 숙소 바로 맞은편 나이트클럽과 주변 술집에서 내는 쿵쾅 대는 음악은 소리와 진동의 형태로 온몸을 감쌌다. 이불속에서 발가락을 꿈지럭 거리며 리듬을 타고 둠칫둠칫 이불속 댄스를 추며 나이트클럽에 누워 있는 것 같은 희한한 기분도 새벽 3시가 되니 약속한 듯 동시에 뚝 멈춰 버린 음악에 묻혀서 사그라들었고 눈 뜨니 바로 아침이다.


둘째 날 아침 눈 뜨자마자 게스트 하우스에서 제공하는 시리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지인들이 챙겨준 과일과 생수에 내가 집에서 갖고 온 온갖 간식을 가방에 잔뜩 챙겨 넣고 길을 나섰다.  전날 숙소를 못 찾아서 헤맸던 이유를 해가 뜨고 서야 알아차렸다. 가스램프 게스트하우스라기에 그냥 게스트 하우스 이름인 줄 알았더니 이 구역 자체가 전부 가스램프였던 거다. 당연히 온 동네방네 가스램프 비스트로, 가스램프 호텔, 가스램프 바 이런 식으로 웬만한 상점은 전부 가스램프 어쩌고였던 것이다.


어마 무시한 미국 달러 환율에 최소한의 비용으로 걸어서 볼 수 있는걸 최대한 눈에 담아 간다는 게 유일한 여행 계획인 나 홀로 여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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