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을 파훼하는 간단한 원리
체력이 넘치다 못해 폭발하던 신입생 시절,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던 저는 매일같이 누군가와 술을 마셨습니다. 친구들, 친구의 친구들, 옆 테이블의 누구든 그냥 마음만 맞으면 내일이 없는 듯이 술을 들이부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진 않았지만 신체 기능이 많이 노쇠한 지금에 비해, 그때는 만취해서 집에 가더라도 기억을 잃지 않았고 다음날 숙취도 그리 심하지 않았기에 무서울 게 없었죠. 얼큰하게 취해 친구들과 헤어져 집에 가는 길은 이상하리만큼 외로웠습니다. 분명 방금까지 모든 걸 다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과 잔을 나눴는데도 말이죠. 아주 잠깐이라도 소외된 듯한 그 느낌이 너무 싫어서, 핸드폰을 켜 손가락 닿는 대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연락이 끊긴 지 몇 년이 지난 친구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술기운과 반가움에 한껏 들떠서, 다음번 술 약속을 잡고는 뿌듯해했던 기억이 나네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집에 도착하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공허함'이 찾아왔습니다. 몸과 마음에 갑자기 미친 듯이 허기가 찾아오고, 취한 상태에서도 김치냉장고 아래칸에 있는 소주를 꺼내 참치캔과 먹곤 했습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여러 감정에 취해버려서 엉엉 울다가 잠에 들기도 했죠. 그땐 뭐가 그리 서럽고, 왜 그렇게 외로웠는지. 정신적으로 참 불안정하고, 유약했던 시기였습니다.
외로움 하면 각자가 떠올리는 감정과 상황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친구, 연인, 가족등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발생하는 소외감을 피상적으로 '외로움'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원만하고 건강한 관계가 우리의 외로움을 해결해 주는 열쇠처럼 여겨집니다.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을 주위에 두면, 그들이 저를 외로움에서 지켜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친구나 연인을 곁에 두어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은 물리적으로 함께 있는 순간뿐이었고, 혼자 있을 때의 공허함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다른 이와 함께 있으려 했고, 술은 그 매개 역할을 했었죠. 그렇게 한잔 두 잔 마시다 보니 폭음이 습관이 되어 건강도 많이 상했고, 부끄러운 일들도 종종 발생하곤 했습니다. 약간의 알코올 중독 증상까지 보여 술을 마시지 않으면 불안했기에 혼자서도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악순환이 시작되기 시작했습니다. 목이 말라 바닷물을 마시기 시작한 거죠.
당시엔 외로움의 원인을 전혀 찾지 못했고, 입대 직전까지 비슷한 생활을 반복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알코올 중독에 관계 중독까지, 아주 피폐한 상태로 군대에 들어갔죠. 그 안에서는 의존하거나,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않는 조용한 밤만을 기다렸고, 아침에 눈이 떠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 어떻게든 아득바득 버티다 보니 저는 어느샌가 책에 재미를 붙여 틈이 날 때마다 독서실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책 안에는 다른 세상이 있었고, 힘이 되는 말들이 많았죠. 더 이상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 없을 때에도, 남는 시간에 책을 읽으며 거의 혼자 보냈습니다. 물론 싸지방(사이버지식정보방)에 가서 친구들과 페이스북 메시지도 자주 주고받았지만, 예전처럼 관계에 갈증을 느끼는 일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사회에 돌아온 후에도, 예전처럼 외로움에 지쳐 사람을 찾는 일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오히려 혼자 절에 들어가기도 하고, 국토종주를 떠나기도 하며 나 자신과 보내는 시간의 재미를 알게 되었죠. 일상 속의 피로한 관계에서 벗어나,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고 스스로의 감정에 집중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일을 다니면서 작곡을 배워 퇴근 후에 곡을 만들기도 하고, 영상편집을 배워 혼자 떠나는 여행 브이로그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점점 독립적인 사람이 되어, 지금은 혼자 있을 때 자유로움과 안정감을 가장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서론이 길었지만, 제 깨달음의 과정을 서술하기 위해 정말 줄이고 또 줄였다는 점 이해 부탁드립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얻은 깨달음은 무엇일까요?
'외로움은 항상 같은 자리에 있다'
라는 한 문장으로 정리하려 합니다. 말 그대로 외로움은 항상 같은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존재합니다. 업무에 집중할 때,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일 때, 연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도 외로움은 그 자리에 있지만 우리는 느끼지 못합니다. 외로움이 우릴 쫓아다니며 괴롭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일상에서 권태를 느끼거나, 변화에 반응하여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때, 그 존재를 비로소 인지하게 됩니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술 한잔할 친구를 찾을 때나, 갑자기 먼 타지로 떠나게 되면 느끼는 외로움들이 단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외로움에 원인이 있어 발생한다면,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있기 마련입니다.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거나, 가족과 연락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일시적으로 해소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이라고는 보기는 어렵습니다. 비슷한 상황이 찾아온다면 우리는 외로움과 또다시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되죠. 저는 많은 고찰 끝에 외로움이 어떤 원인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 아니며, 항상 우리와 함께 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즉,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줄곧 같은 자리에 있던 외로움을 인지하느냐, 인지하지 못하느냐의 차이인 것이죠.
다시 제 이야기로 돌아와서, 과거의 저는 왜 그렇게 외로웠을까요? 당시 생각했던 것처럼 혼자 있는 것이 정말 외로움의 원인이라면, 지금의 저는 어떻게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독립적인 사람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는 삶의 지향점이 나를 향하지 않았던 같습니다. 더 많은 친구를 사귀고,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싶어 했으며 타인의 관심이 곧 나의 정체성이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에는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고, 주체적인 삶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딱히 없었으니 혼자 보내는 시간이 외로움의 늪에 빠져드는 기분이었죠. 그럴 때는 항상 핸드폰 액정 속으로 도피하곤 했습니다.
반면 지금은 철저히 '나를 위한 삶'에 목적이 있습니다. 스스로의 삶에 온전히 집중해서, 내가 뭘 원하는지 고민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생각합니다.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거나 게으름을 피울 때가 있어도, 그것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잠깐의 휴식일뿐이라 생각하기에 다른 감정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시선이 오롯이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기에 외로움을 인지할 일이 없습니다. 종종 큰 파도가 찾아와 잠시 흔들리더라도, 휩쓸리지 않고 다시금 중심을 다져갈 수 있습니다. 관계를 위한 관계가 아닌, '나'를 위한 관계를 유지하고 지켜나갑니다. 잦은 연락이나 만남이 아니라, 나와 상대에 대한 두터운 신뢰를 통해 관계를 유지합니다.
외로움은 그저 같은 자리에 있을 뿐, 우리가 관심을 주지 않는다면 인지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외로움을 느낄 필요도, 느낄 일도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삶의 주인으로서,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말이죠. 당연히 내 삶의 주체가 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앞서 기술했듯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원하며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스스로 깨닫는 '메타인지'가 필요합니다. 많은 경험과 실패, 그를 통한 통찰이 있어야 우리는 자신을 깨우쳐가며 인생의 키를 잡을 수 있습니다. 중간에 파도를 만나 일시적인 허전함이나 공허함이 찾아올 수도 있지만, 우리는 운동이나 다른 취미생활 등을 통해 내 안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건강해진 정신과 신체에는 그런 사사로운 감정이 드나들 틈이 점점 좁아들게 되며, 선순환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머릿속에 떠돌기만 하던 생각을 글로 정리하려니 매우 장황하고 두서가 없네요. 사실 깨달음이라고 말하기엔 저 또한 글에서 피력하는 '주체적인 삶 살기'를 잘하고 있다고 말하기엔 부족합니다. 경험을 통해서 머릿속에 들어온 통찰을 글을 통해 정리하는 것도 깨달음의 중요한 과정이고, 제 삶에도 좋은 이정표가 되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앞으로는 그 부족함까지 전부 털어놓는 솔직한 공간으로 브런치를 활용하려 하니 다음 글도 기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