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누구한테 투표했어?
지금이야 트로트가 세대 구분 없이 즐겨 듣는 노래지만, 이런 시기가 오리라 누구나 예상치는 못했다. 종종 안부를 여쭈려 외삼촌께 전화를 걸 때마다 들리는 가슴 울리는 비트와 쿵짝 모드 음악. 그때는 몰랐지. 어린아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온 세대가 함께 모여 트로트 콘서트를 관람하리라는 것을. 내가 아닌 할머니를 위해 고척돔 티켓팅을 사수해야 할 줄 누가 알았을까.
일 년이란 시간을 집에만 콕 박혀 무언가 준비하던 시절이 있었다. 2020년 2월, 편입시험 15군데 탈락이라는 쓴 고비를 마신 후 재정비해야 할 차례가 온 거다. 원래 다니던 대학으로 돌아가거나 다시 한번 도전하거나. 일 년을 들여 공부한다고 해도 합격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저 나와의 싸움이 시작된 일이었다. 그쯤이었다. 저녁을 준비해 주던 어머니의 입술에서 흥얼거리는 가락이 흘러나온 것이. “나 그 노래 들어본 거 같은데!” 지나가며 한 번씩. 아, 큰 고모 환갑잔치 하실 때 막내 고모가 불렀던 노래였나. 흥얼거림은 끝이 없이 이어졌다. 어른 판 오디션 프로그램의 시작이었던가!
가사 전달력이 좋아서, 우리 아들이 생각나서, 군대 간 손주와 비슷해서. 이런저런 이유로 오디션에 나온 참가자를 응원한다. 코로나로 인해 어지러운 세상 가운데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목소리가 등장했다. 자연스레 저녁을 먹으며 그들의 노래를 듣게 되고, 목요일을 기다리는 순간이 오게 됐다. “엄마, 저 사람 봐봐. 이름이 영웅이래. 어떻게 노래도 잘해? 진짜 영웅이다.” 그 순간 어머니의 얼굴에서 조정석 배우의 야나두 광고가 스쳐 지나갔다. 너도? 나도! 어머니의 픽까지는 그러려니 했지만, 오랜만에 방문한 할머니 댁에서 영웅 씨 노래가 흘러나오는 걸 보니 그제야 깨달았다. ‘덕질도 유전이 될 수 있구나.’
애정하는 대상을 통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자세히는 취향을 통해 그 사람을 더 알아가는 방법이다. 삼대를 걸쳐 우리 모녀가 영웅 씨를 좋아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선한 얼굴 속 진실된 목소리로 노래하기에. 나의 애정은 그가 우승했으면 하는 응원이었고, 어머니의 애정은 출퇴근 길 차 안에서 흥얼거리는 멜로디였으며, 할머니의 애정은 말 그대로 ‘덕질’ 그 자체였다. <미스터 트롯>은 끝났지만 할머니의 집에서는 여전히 방송이 지속된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고, 듣고 또 들어도 같은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는 나의 소녀 순예 씨!
세대를 거스르는 할머니와 나의 대화법은 영웅 씨로 통한다. 어릴 때부터 아이돌을 좋아하며 꾸준한 덕질을 이어왔던 나의 이야기를 할머니가 이해하고, 콘서트를 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려 손녀가 함께 영화관으로 향한다. ‘아임 히어로 더 파이널’ 며칠 전 그의 콘서트 실황과 비하인드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개봉했다. 우리 세 모녀가 나란히 손을 잡고 함께 보고 온 그 영화. 일주일 전부터 목소리 톤이 한층 높아진 우리 순예 씨의 모습을 보니 덕질의 순기능에 감탄하는 중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인해 먹지 않아도 배 부르다는 그 마음. 어쩌면 좋을까 나의 소녀를. 소녀의 행복이 꾸준히 이어지도록 그녀의 덕질을 열심히 응원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