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남편에게 물었다.
“내가 당신에게 맨날 하는 말이 있잖아요? 당신이 나를 00000 한다고 내가 말하잖아?”
“가스라이팅!”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하루를 지배한다고 한다. 아이들이 있을 땐, 아이들이 먼저였다. 눈만 뜨면 애들을 먼저 챙겼다. 남편이 불만을 느끼기도 했다.
“애들한테 신경 쓰는 것 반의반만이라도 신경 좀 써라.”
늘 불만이었다. 같이 맞벌이했지만, 육아는 오롯이 내 차지였다. 아침이면 남편 출근 준비하고, 두 아들 챙겨서 출근하려면 정말 내 꼴은 말이 아니었다. 세련된 선생님의 모습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동네 아줌마, 겨우 세수하고 학교에 와 있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늘 피곤했고, 교사인 내가 낮 시간 우리 학급 아이들 앞에 서서 잠이 쏟아지는 날도 있었다. 남편이 원하는 기준은 전업주부처럼 해 주기를 바라는 듯했다. 불만이 많아 전투적으로 살았다. 너무 힘들어 심각하게 이혼까지 생각한 적이 있다.
내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여자는~~ 여자는~~”이라는 말로 나를 가스라이팅 했다. 엄마도 그게 가스라이팅 시키는 것으로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 시절 엄마가 생각하는 딸의 장래를 위한 생각이었으리라. '순하고 고분고분하게 살아야 시댁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새해 첫날 여자는 남의 집에 먼저 들어가도 안 되고, 남자가 누워있으면 그 위를 넘어가도 안 되고, 남편을 받들어야 하고, 순종해야 하고, 등등 여자가 안 해야 할 일들이 많다.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다. '나는 여자니까.' 가정을 위한 희생,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들을 둘 낳고 나니 세 남자를 섬겨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들들도 집에서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게 내 가정을 살리는 일이고,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은근히 아들 중심으로 살게 되었다. 가부장적인 집안의 종손으로 대접받으며 살아온 남편은 자기가 뒷전이 되었다고 불만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두 아들이 6개월 사이로 연이어 결혼하고 빈둥지증후군을 겪고 있는 나에게 갑자기 바뀐 세상이 나타났다. 집에서 손끝 까딱 안 하던 녀석들이 색시를 데리고 집에 오더니 설거지는 자기들이 하겠다고 덤빈다. 아들들 시키지 않던 게 불편해서 내가 해버릴 때도 있다. 그리곤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억울해서 이젠 나도 안 한다. “아들들 네가 해라.” 남편은 너희들 어릴 때 기저귀 한 번 안 갈아 주고 육아에 손도 안 대던데, 이놈들은 앞장서서 육아달인이다. 기저귀 갈고, 애들과 놀아주고, 집안 살림살이를 알뜰살뜰 같이한다. 그래, 그게 맞긴 하지.
이제 우리 부부 둘만 집에 있다. 눈만 뜨면 가장 먼저 남편을 찾는다. 항상 먼저 일어나는 남편이 좁은 집안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테지만 “아빠, 어디 있어요?”다. 남편이 좀 아팠던 날부터 부쩍 더 남편을 살피게 되었다.
말이 약간 어눌해졌다는 소리에 병원 응급실로 갔다가 갑자기 일주일 이상 입원 하게 된 후 퇴원했을 땐, 남편 중심으로 살겠다고 다짐했었다.
‘남편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대로만 있어주세요. 이젠 당신이 내 하루를 지배하는 사람인가 보다.’
이젠 나 스스로 가스라이팅 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받아 온 약을 착실히 먹으며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준 요즘, 또 나의 이기심이 발동하고 있다. 환자로 인정해 주고 싶지 않고, 잊어버리고 싶다. 남편이 오히려 환자 대접을 요청한다.
“나 환자야.”
서서히 가스라이팅 당해서 살던 내가 눈 뜨고 있다. 남편에게 "내가 가스라이팅 당하며 살았다"라고 수시로 말하며 이젠 그렇게 하지 않겠노라고 노래 부른다. 남편은 자기가 나를 가스라이팅 했다고 진짜 믿는 건가? 남편이 자기 스스로 가스라이팅 한 사람이라고 내게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다. 내 질문에 확실히 정답을 말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가스라이팅 당하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