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로맨스 / 우디 앨런
가을의 비 오는 날, 뉴욕에서 보내는 하루
그리고 재즈
남편과 나의 최애 영화 중 하나이자 가을에 가장 어울리는 영화.
우디 앨런의 영화답게 처음부터 끝까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화의 향연으로 진행되는 내러티브.(번역가가 참 힘들겠다 싶었는데 그 영화를 내가 번역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서인지 마치 <비포 선셋> 시리즈와 비슷한 느낌을 들기도 한다. 오로지 대화만으로 인물들 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재미가 있다는 부분에선 비슷하지만, 두 주인공에만 집중하는 <비포 선셋> 시리즈와 달리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인물 관계가 그보다 다양하기 때문에 <비포 선셋> 시리즈를 지루하게 느끼는 사람들도 재밌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핫한 배우들, 티모시 샬라메, 엘르 패닝, 셀레나 고메즈가 주연인 데다 주드 로, 리브 슈라이버처럼 유명한 배우들도 등장한다.
앞서 말했듯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대화를 통해 모든 인물의 배경과 관계를 묘사하고 또 그 관계가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대화의 흐름과 양상에 중점을 둔다면 좀 더 풍부하게 작품을 즐길 수 있다.
개츠비와 애슐리
대학교 커플인 둘은 어쩐지 처음부터 잘 맞지 않는다. 얼핏 보면 둘은 서로 열렬히 좋아하는 듯 보이고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 얘기의 주제는 서로 판이하게 다르다. 애슐리는 자기가 학교 신문을 위해 취재할 영화감독과 그의 영화, 개츠비는 맨해튼 나들이. 서로 다른 관심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바쁘다. 또 애슐리의 문화적 소양은 그리 깊지 않아 보이지만, 개츠비는 소위 무용한 것에 조예가 깊은 듯하다. 이 둘은 각자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최소한의 호응만 하는데 신기하게도 둘 다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 상대방에게 서운해하지 않는다. 서로 애정이 없는 관계임을 보여 주는 노골적인 신호일지도.
개츠비와 챈
반면, 챈과 개츠비의 대화 양상은 위의 둘과 상당히 다르다. 얼핏 보면 둘의 대화에는 날이 서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이인데도 서로 거침없이 비판하고 비꼬고 또 날카롭게 대꾸한다.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둘은 설령 의견은 다를지언정 같은 주제에 관해 깊이 토론한다. 때문에 피상적인 대화만 하는 애슐리와 개츠비에 비해 공격적인 것 같지만, 겉으로 다정한 듯 보여도 속마음을 나눌 수 없는 대화보다 진정으로 교감하는 것임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어찌 보면 충격적이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여전히 그리고 엄연히 존재하는 뉴욕의 상류층 사교계. 심지어 여전히 공식적인 '데뷔당트'까지 있을 정도로 공고한 그들만의 세상. 영화는 뉴욕 상류층이 향유하는 문화를 상류층의 이단아 개츠비의 시선으로 약간의 경멸을 담아 보여 준다.
개츠비는 <위대한 개츠비> 속 개츠비와 달리 속물적인 사교계와 사교계 사람들, 그리고 한가운데 있는 자신의 가족을 싫어하지만, 실은 자신 역시도 그런 집안의 돈으로 고급스러운 문화적 소양을 키워 온 속물의 산물이며 여전히 그 지위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이기도 하다. 어찌 됐든 뉴욕 사교계의 이단아 개츠비보다도 더 시니컬한 뉴요커 챈이 개츠비의 면전에서 이걸 꼬집을 때, 개츠비는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를 이렇게 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
뼛속까지 뉴욕의 상류층이면서도 이단아를 자처하는 개츠비가 비 오는 날 뉴욕 시내 한복판을 여기저기 누비는 덕에 영화를 보는 우리도 그와 함께 뉴욕 로컬이 갈 법한 곳들을 돌아다니며 개츠비 취향의 문화 생활을 공유하고, 이단아로서의 낭만을 담을 재즈까지 즐길 수도 있다. 마치 나도 뼛속까지 뉴요커가 된 것처럼 말이다. 진짜 뼛속까지 뉴요커인 우디 앨런의 모든 영화가 그렇듯 이 작품 역시도 애정을 꾹꾹 눌러 담은 뉴욕에 대한 예찬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