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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p 19. 2023

리뷰_<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전시회추천/책추천

이런저런 문화 잡식성인 내가 가장 어려워한 분야는 바로 미술이었다. 그림을 보고 대단하다, 예쁘다는 생각은 들어도 여기서 뭘 더 보고 느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안 왔다. 갤러리 인턴도 한 내가 이런 속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부끄럽기도 했지만 어쩌겠나. 취미 생활을 공부까지 하면서 즐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런 내가 최근 몇 년 사이에 미술에 조금씩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런저런 전시회를 다니던 게 자연스레 영향을 준 것 같다.


문외한에게도 흥미로운 살바도르 달리의 전시회, 유명한 그림을 미디어 아트로 옮겨 놓은 전시회, 통통 튀는 아이디어로 만든 포토존이 많은 전시회,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회 등등.


여러 전시회를 다니면서 내 취향을 서서히 알게 됐다. 난 설치 미술, 미디어 아트, 추상화 등 현대 미술보다는 고전 명화나 회화 위주의 전시회를 좋아한다는 것.




초보 관람객이 전시회를 보기 전에 읽으면 좋은 책

그런 전시회들에서도 즐기는 법을 몰라서 진품 그림이 주는 위압감을 즐기는 선에서 그쳤다. 어느 순간 전시회를 100퍼센트 즐기지 못한다는 갈증이 생겼고, 자연스럽게 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어느 날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눈에 띈 <방구석 미술관>을 충동적으로 집어 들었는데 이 책은 미술의 미음도 몰라도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책의 가장 좋았던 점은 단 한 권의 책이었지만, 나름 미술을 즐기는 법을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는 것이었다.


 화가의 인생 배경과 성향을 알고 그림 한 폭에 얼마나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담아냈는지 하나하나 알아간다는 점에서 미술은 내 전공인 문학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문체와 내러티브 대신 붓터치와 명암과 색감 등과 같은 미술적 요소를 살펴본다는 점뿐. 나 같은 문외한은 이것만으로도 그림을 더 재밌게 즐길 수 있었다.




거장의 시선

사실 이 책이 내게 많은 도움을 줬다는 것을 실감한 건 오늘 본 전시회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덕분이었다.


이 전시회의 순서는 <방구석 미술관>처럼 시대순으로 15세기 르네상스부터 인상주의 회화를 다루고 있다. 신을 중심으로 사고하던 르네상스 시대에선 성경이나 신화 속 장면을 그린 종교화가 많았고 사실적 묘사에 집중했다. 이후 인본주의가 시작되면서 초상화가 늘어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에는 극사실주의 표현법의 그림이 많아서 보기만 해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위압감이 어마어마했다. 머리카락 한올, 피부 표현, 옷의 질감, 여러 장식을 리얼하게 살리고 완벽한 원근법과 입체적인 표현으로 사진보다 더 실제 같고, 평면화임에도 홀로그램처럼 보이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인간의 기술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장인 정신을 담은 그림은 사진과는 다른 위압감을 지니고 있었다.



겁탈당한 가니메데 - 다미아노 마차

첫 전시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 커다란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으로 독수리로 변한 주피터에게 한 인간이 잡혀가는 모습이다. 신에게 잡혀갈 정도로 아름다운 인간이라고 한다. 역동적이고 독수리의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대작이라 가장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유리가 있는 액자라 빛 반사가 심한 점은 조금 아쉬웠다.



여인(루치아 알바니 아보가드로 백작부인 추정, 붉은 옷을 입은 여인) - 조반니 바티스타 모로니

많은 초상화 중에서 눈에 띈 그림은 바로 이 작품. 어느 각도에서 보든 실제 사람처럼 계속 눈이 마주치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입체적이었다. 새틴 질감과 옷감의 두께까지 표현해 낸 것도 굉장히 리얼해서 옷감의 묘사만으로도 감탄이 나올 정도. 하지만 손가락에 낀 반지의 섬세한 세공까지 그린 디테일까지 본다면 더욱 실감 나게 즐길 수 있다.



보좌에 앉은 성모자와 네 천사 - 퀸텐 마시스 / 어린 공주(덴마트의 도로테아 추정) - 얀 호사르트

입체감이 남달랐던 그림들.

왼쪽은 별다를 것 없는 종교화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날아다니는 두 천사는 튀어나오고 양 옆에 서 있는 두 천사는 가운데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보다 더 뒤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분명 평면으로 그린 그림임에도 홀로그램처럼 입체적으로 느껴지는 신비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

오른쪽 그림 역시 입체적 표현아 뛰어나서 옷보다 얼굴이 튀어나온 듯한 묘사와 풍선 같은 퍼프 어깨가 놀랍도록 리얼하게 느껴진다.



기도하는 성모 - 조반니 바티스타 살비

마치 대비를 강조한 사진처럼 명암 묘사가 뛰어난 그림. 멀리서 보면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리얼한 자연광을 표현한 화가의 관찰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짐작된다.



물, 불 - 요아힘 베케라르 (<4연소> 연 중)

개인적으론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그림 중 하나. 4 연소를 그린 연작 중 두 작품인 <물>과 <불>이 이번 전시회에 전시됐는데 대형 작품인 데다 화풍도 터프해서 강한 포스가 느껴졌다. <물>에선 몇몇 인물들이 카메라 렌즈를 보듯 관객을 바라보는 시선 처리를 하고 있어 마치 순간 포착을 한 것 같이 역동적이었다. 해당 그림 왼쪽 하단엔 민물고기, 오른쪽 하단엔 바다 물고기가 구분돼 있다는 점과 뒷배경에 작게 그려진 지하실에서 올라오는 남자처럼 디테일한 묘사를 발견하는 재미도 있는 작품이었다.



레드 보이 - 토머스 로렌

단순히 의뢰인의 아들을 그린 초상화지만 남자아이의 뛰어난 미모와 뽀얗고 투명한 피부 표현이 훌륭해서 오래 감상하게 된 작품.



머큐리와 거짓말쟁이 나무꾼이 있는 풍경 - 살바토르 로사 / 베네치아 카나레조 입구 - 카날레토(조반니 안토니오 카날)
여인(마담 드 클레옹 추정) - 장 바티스트 그뢰즈
뱅크스 피의 존 스콧의 초상 - 폼페오 지롤라모 바토니 / 존 스튜어트 경과 버나드 스튜어트 경 형제의 초상 - 안토니 반 다이크

종교 개혁 이후엔 개신교(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이 분리되어 종교뿐 아니라 일상의 아름다움까지 그림에 담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종교화와 부자나 귀족들의 초상화 위주였던 그림들 사이에서 풍경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터치의 리얼함은 조금 떨어졌지만 마음이 편안해지는 색감이나 주제로 감상하기 편해진 그림이 많았다.


작은 집이 있는 숲 풍경 - 메인더르트 호베마

내가 가장 좋아했던 풍경화. 커다란 자연 속에서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이 아주 자그맣게 담겨 있는 작품.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감상하면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이나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 등을 발견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그려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헤로와 레안드로스의 이별 -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

여전히 신화 이야기를 담은 그림도 있었는데 확실히 르네상스 초기 작품들에 비하면 경계선이 뚜렷한 묘사보단 뭉개진 붓터치로 아련한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 특히 희미한 구름에 가려진 건물과 사람 형(님프)을 한 파도가 굉장히 인상적인 그림이었다.



목욕하는 사람 -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 붓꽃 - 클로드 모네 / 풀이 우거진 들판의 나비 - 빈센트 반 고흐

인상주의로 넘어가면서 거칠었던 붓터치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더욱 뭉개지고 리얼한 묘사는 더욱 주관적으로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부드러운 색감 위주의 작품으로 한국인들에게 사랑받는 인상주의 화가들 르느아르, 모네, 고흐의 그림들에 한 점씩 전시돼 있다.

이 중 내게 가장 신기했던 건 마지막 사진 속 고흐의 작품. 가장 맨 위에 올린 금빛 물감이 초록 잔디밭이 반짝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사실 소장용으로는 예쁜 색감 위주의 작품을 좋아해서 인상주의 그림을 좋아하지만 실제 감상할 때의 재미는 볼거리가 많고 보기만 해도 감탄이 나오는 중세/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이 재밌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시대의 그림은 다른 재미를 준다고 할 수 있다. 영국 내셔널 갤러리의 소장품 중 52점을 들여왔다고 들었는데 하나하나 감상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벌써 끝났나 싶을 정도로 즐겁게 관람한 전시였고 개인적으로는 그림을 하나하나 즐기는 재미를 처음 체감한 첫 회화 전시이기도 했다. 전시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회화를 좋아한다면 한 번쯤 가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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