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J는 연애할 때부터 서로를 편안하게 생각해서 결혼할 무렵쯤에는 이 이상 가까워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깝고 편한 상태였다. 이보다 더 가까운 단계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결혼한 지 10년 가까이 된 지금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세상엔 언제나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다.'
타인과 맺을 수 있는 관계에서 가장 친밀한 단계에 도달했다 생각했지만, 그 이상의 관계도 분명 존재했다.
이걸 일상에서 불쑥 실감할 때가 있다.
'하나님한테 우리 좀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자.'
자기 전에 기도를 하려는데 J가 말했다.
'참 기독교인다운 말을 하네' 싶다가 갑자기 떠올랐다.
J는 나와 친구가 된 이후에 기독교인이 됐다는 사실이...
당연한 얘기지만 J가 교회를 처음 다니기 시작했을 땐 기독교 문화도 낯설어하고 기독교적 표현이나 용어도 잘 알지 못했다. 근데 그런 J가 개종한 지 1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자 날라리 신도 와이프와 함께 날라리 신도로 살았음에도 어느새 꽤나 기독교인다운 표현을 하는 것이었다. 격세지감이 느껴지면서도 이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게 참 많이 닮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 초반에 난 J가 고생하는 것 같으면 '불쌍하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어느 날, J가 '난 불쌍하지 않아. 행복해'라고 대답했다. 그때 J와 나의 '불쌍하다'는 정의가 달랐던 것이다. J의 '불쌍하다'는 소위 'loser' 혹은 '불행한 사람'이란 뜻에 가까웠고, 나의 '불쌍하다'는 '안타깝다' 혹은 '측은지심'에 가까웠다.
그래서 난 J에게 말했다.
내게 '불쌍하다'는 네가 하는 고생을 잘 알고 있으며, 당연하고 작은 고생조차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너를 안타깝게 여긴다는 뜻이라고. 그리고 서로의 사연과 서사를 깊게 알고 있는 부부와 가족끼리 서로의 인생에 대해 측은지심을 느끼지 않으면 그건 사랑이라 할 수 없다고 말이다.
J는 곧바로 내 뜻에 동의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J도 '불쌍하다'는 표현을 자주 쓰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날 우리는 단어에 대한 정의만 같아진 게 아니었을 것이다. 단어 하나에 담긴 많은 가치관도 같아진 것이리라.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서로의 인생에 대해 측은지심을 느끼고 안타까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실은 우리 모두 불쌍한 존재라는 것, 나의 힘듦을 사랑하는 사람과 공유해야 한다는 것.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은 언어가 같아졌을까? 그리고 아직도 얼마나 다른 언어를 쓰고 있을까?
어쩌면 맞춰 가야 할 부분이 더 많을지도 모르지만, 어느새 자연스럽게 나와 같은 언어를 쓰는 남편을 보자니 우리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확인받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