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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p 04. 2024

잊고 지냈던 나의 자양분

30대에 접어들어서 가장 크게 느끼는 점 중 하나는 내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자양분은 어린 시절 형성됐다는 사실이다.


늦여름 오롯이 쉬고 싶어 남편과 함께 외진 숲 속에 있는 독채 펜션으로 휴가를 떠났다.


그곳은 우리 기대만큼 외졌고 자연을 잔잔하게 즐길 수 있는 조용한 곳이었다.


독채 펜션 마당에 설치된 해먹을 보자 어릴 적이 떠올랐다. 주말마다 아빠와 함께 뒷산을 오르던 기억이었다. 초등학생부터 중고등학생 때까지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산을 올랐는데, 정상에 올라가면 아빠가 나무와 나무 사이에 해먹을 걸어 주셨고 나는 그 위에 누워서 <해리 포터> 시리즈나 좋아하는 추리 만화책을 열심히 읽었다. 그렇게 몰입해서 읽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하지만 수험생 시기를 지나 대학생이 됐을 때는 공부하느라 혹은 노느라 바빠서 아빠와 함께하던 등산은 점차 나의 일상에서 사라졌다. 가끔 뒷산에 오르더라도 산의 분위기 역시 예전의 그 왁자지껄하던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렇게 내 작은 행복은 기억에서 잊혔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등산의 루틴은 사라졌지만, 그때의 흔적은 나한테 깊이 남아 있었다. 유학 시절, 전공 특성상 매 수업마다 책을 일정 분량 읽어 가야 했기 때문에 학기 중에 나는 언제나 책을 읽는 사람이었다. 독서는 고독한 일이었고, 나는 책을 읽을 때면 자연스레 혹은 무의식적으로 실내를 벗어나 야외로 나갔다. 다행히 캠퍼스는 자연과 벤치가 풍부한 곳이었고, 나는 늘 도서관 주변에서 그늘진 벤치에 앉아서 혹은 누워서 혹은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었다. 그렇게 책을 읽으면 어쩐지 독서는 더 이상 고독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혼이 치유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소중한 나만의 시간이었고, 독서는 더 이상 매 수업 반드시 읽어 가야 하는 치열한 싸움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그런 나를 보고 ‘자유인’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당시에도 이 의견에 상당히 동의했었다. 그 시간에는 돈도 친구도 필요 없었고 타인의 시선도 상관없었으며 오히려 혼자라서 좋았기 때문이었다.


이때의 기억이 유학 시절 가장 좋았던 시간으로 꼽을 수 있었던 건 자연 속에서 책을 읽고 그걸 자유라고 느낄 줄 알았던 어린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혼자의 시간을 만끽하며 행복을 느꼈던 추억이 차곡차곡 쌓여 가장 혼자인 시간을 최고의 순간으로 생각한다는 건 내게 커다란 자양분이었다.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어떤 시선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100% 집중하며 그 시간을 즐기는 법을 아는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난 이 사실을 30살을 훌쩍 넘겨서야,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이 자유를 다시 느껴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독립적인 성격인 데에는 많은 영향이 있었겠지만 어쩌면 사소한 어린 시절의 기억도 한몫했을 수도 있겠다.


숲에서 오래전 추억이 떠오른 뒤 문득 깨달았다.  한국에 돌아와서 일을 시작한 뒤로는 야외에서 힐링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없는 것을. 국내 여행을 할 때는 항상 호텔에 선호했고, 해외여행을 다닐 때는 열심히 돌아다니는 데 집중했다. 가끔 홀로 외출했을 때도 가만히 벤치에 앉아 여유를 느낀 시간은 30분도 채 안 됐다. 항상 갈 곳이 있었고, 항상 할 일이 있었다. 서울에서는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지쳤고, 러시아워를 피하느라 시간에 쫓겼으며, 어딜 가나 사람이 많아서 날 위한 빈자리는 없었다. 틈틈이 혼자인 시간을 만끽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턱 없이 부족했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어쩐지 절실해졌다.


올 가을에는 어떻게 해서든 좋은 벤치를 하나 찾아서 온종일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소중한 자양분이 없어지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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