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 판타지 / 웹소설
*스포 없음*
장르의 장벽만 넘으면
모든 면에서 완벽한 최고의 멜로이자 판타지 작품
일주일 동안 완결된 <상수리나무 아래> 독파를 위해 미뤄뒀던 재탕을 시작해 푹 빠져 살다 보니 문득 나의 남자 캐릭터 취향이 학창 시절부터 참 한결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유독 자제력이 뛰어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 앞에서만 터져 나오는 속내를 드러내고 흐트러지는 장면에서 느낄 수 있는 짜릿함을 좋아했다. 독자들을 이런 감정까지 몰고 가는 것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몇몇 작품들은 성공적으로 해냈다.
<오만과 편견> 속 다아시가 그랬고, <제인 에어> 속 로체스터가 그랬듯.
<어톤먼트>의 로비는 세실리아를 재회하고 그녀와 거리를 두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지만, 세실리아의 손길 한 번에 눈동자가 요동치며 힘겹게 쌓은 벽이 무너지는 장면은 가슴 아프면서도 짜릿하다.
<상수리나무 아래>의 리프탄도 마찬가지다.
차갑고 냉정하며 냉소적이기까지 한 대륙 최고의 기사이자 급성장한 영지의 주인이 맥시 앞에만 서면 모든 방어벽을 잃어버리고 상처받은 맹수처럼 흐트러지는 모습은 묘한 쾌감을 준다.
정중하고 다정다감하며 안정적인 정서를 지닌 남자 주인공도 충분히 매력 있지만, 난 아무래도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고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경직된 인물에서 더 큰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현실에서 다정한 사람은 간간히 만나봤지만, 고독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통제하면서 살아온 인물이 자기 자신을 내어줄 정도의 사랑을 하는 건 소설 속에서만 볼 수 있으니까.
더욱이 리프탄은 이런 외로운 늑대 타입의 최강자라고 할 수 있다. 알파 메일 중 알파 메일로 자타공인 뛰어난 전투 실력과 오랜 군사 경험, 어떤 순간에서도 신뢰할 만한 상황 판단 능력을 지녔고, 육체적으로도 압도적이며, 뛰어난 지략가의 면모까지 가졌으니 이런 사람이 과연 현실에 존재할까 싶다.
심지어 보잘 것 없던 과거에도, 대륙을 구한 신화 속 영웅의 현신이 된 현재에도 공작이든 왕이든 누구를 만나든 동요가 없고 하고 싶은 말은 하는 소위 '기존쎄' 캐릭터다.
그런 성벽 같이 단단한 사람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한없이 여리고 약해지는 모습을 보이는 건 그녀에 대한 사랑을 반증하는 것이기에 독자 입장에선 짜릿할 정도로 설렐 수 밖에 없다.
1부에서는 늘 억압당하며 살아온 맥시가 리프탄 앞에서 뱃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긴장하면서도 동시에 설렘을 느끼는데 이 심정에 이입하면 독자도 맥시가 느끼는 짜릿한 긴장감과 간질간질한 설레임을 느낄 수 있다. 2부에서는 마침내 그런 남자의 성벽 안에 들어갔을 때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누구도 원하지 않은 정략 결혼. 평생 홀로 살아남아야 했던 천민 출신 기사 리프탄과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학대받으며 살아온 크로이소 공작가 영애 맥시밀리언. 크로이소 공작의 계략으로 둘 중 누구도 원하지 않은 정략 결혼을 억지로 하게 된다. 결혼을 유효하게 하는 첫날밤까지 거친 뒤, 리프탄은 다음 날 곧바로 크로이소 공작을 대신해 드래곤 토벌에 나선다.
3년 후, 누구도 살아돌아올 것이라 생각하지 못 했던 토벌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리프탄은 3년 만에 처음 만난 아내 맥시를 데리고 곧장 자신의 영지 아나톨로 향한다. 하지만 맥시는 드래곤 토벌 후, 대륙을 구한 영웅으로 추앙받는 리프탄이 자신과 이혼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혼당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아버지 크로이소 공작의 협박에 두려움에 떨었기에 이런 리프탄의 반응에 어리둥절해한다. 이유야 어찌 됐든 평생 크로이소 성 밖으로 나가보지 않았던 맥시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다.
이후, 맥시는 리프탄과 함께 상상하지도 못 했던 경험들을 마주한다.
솔직히 말하면 <상수리나무 아래>를 끝까지 읽고, 고전 소설과 현대 소설 전부 통틀어서 인물 설정과 묘사를 이렇게까지 입체적이고 깊이 있게 한 소설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포를 제외한 대략적인 인물 설정만 본다면 별다를 게 없어보이지만, 끝까지 소설을 읽으면 인물들이 크고 작은 특정 성향, 버릇, 말투, 습관, 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정확한 개연성이 있다.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인물이 변화하는 과정마저도 명확하고 납득될 만한 이유를 가진다. 캐릭터에 있어서는 내가 본 모든 책 중에서 가장 정교하게 계산됐다고 느꼈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처음 봤을 때 놀랐던 치밀함과 비슷했다. 난 이 시리즈를 처음 발매됐을 때부터 읽었는데, 7부의 내용이 1부부터 철저하게 계산된 설정임을 알았을 때 작가의 치밀함과 개연성에 감탄했다. 하지만 <해리 포터>는 그 치밀함이 사건에 집중됐다면, <상수리나무 아래>의 정교함은 인물에 집중하고 있다. <상수리나무 아래> 역시 작가의 철저한 계산 하에 사건이 진행되지만, 인물의 설정과 변화에 관한 치밀함은 그 어떤 작품보다 섬세하고 자세하며 정교하다.
단 하나의 우연도 없으며, 모든 인물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와 배경이 있다.
따라서 단순한 스토리 진행과 단편적인 인물 설정이 주는 사이다를 기대한다면 곤란한 작품이 될 수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특히 리프탄과 맥시는 마치 실존하는 사람처럼 굉장히 입체적이다. 둘은 삶의 무게를 지독히도 경험한 복잡한 인물이기 때문에 이들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를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이 인물들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 할 확률이 크다. 그리고 특정 시점이 되면 독자들을 확실하게 납득시켜주기 때문에 작가를 믿고 긴 호흡으로 감상하는 게 중요하다.
스포 때문에 자세하게 얘기하지는 못 하지만, <상수리나무 아래>는 많고 많은 로맨스 판타지와는 다르게 판타지를 로맨스의 배경으로만 활용하지 않았다. <드래곤 라자>, <가즈나이트>, <반지의 제왕> 등 여러 유명한 판타지를 읽어봤지만, <상수리나무 아래>를 통해서도 판타지적 만족감을 충분히 채울 수 있었다.
당시 시대상이나 풍경과 음식에 대한 묘사도 디테일하지만, 원정과 전쟁에 대한 묘사도 머릿속에 훤히 그려질 정도로 자세하다. 그 외에도 연회 장면, 마을 축제, 베드신 등 여러 볼거리를 제공하고, 이야기가 펼쳐지는 장소도 성, 대자연, 깊은 산맥, 전쟁터, 원정, 대성당, 궁전, 학교 등 다양하다. 로맨스적 요소만 보더라도 가히 독보적인 작품이지만, 정치, 군사 전략, 마법 등 판타지적 요소도 십분 살리면서 로맨스의 감정선을 상황에 맞게 다양하게 변주하며 스토리에 녹여낸 작품이다.
완결까지 크고 작은 사건과 갈등이 계속해서 이어지는데, 사건 진행이 빠르고 속도감이 있어서 답답하지 않고, 능숙하게 긴장감을 조절하는 작가의 필력에 오히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해 순식간에 몰입하게 되고 어디서 멈춰야 할지 모른 채 끝을 향해 달리게 된다. 아마도 이건 연재가 끝난 후에 읽는 독자들의 혜택일지도 모르겠다.
나름 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를 봐온 나지만, 웹소설인 <상수리나무 아래>가 이렇게나 강렬한 작품으로 남은 건, 그리고 읽을 때마다 그 강렬함이 줄어들지 않는 건, 그리고 어쩌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전 로맨스 소설인 <오만과 편견>이나 <제인 에어>보다도 더 짜릿했던 건 탁월할 정도로 섬세한 감정 묘사와 디테일한 인물 설정 때문일 것이다. 감히 내가 읽은 소설 중에서 인물들의 가장 깊숙한 감정들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지금까지 읽는 동안 설레임을 준 작품은 많지만, 끝나고도 이렇게 감동적인 여운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작품이 있었던가. 돌이켜 보면 없었던 것 같다. 슬퍼서가 아닌 감동적이어서 독자를 눈물 흘리게 만드는 필력이라니. 눈부시게 아름답고 가슴이 아플 정도로 애절한 감동을 주다니. 이 위대한 작가는 언제부터 어떻게 이렇게 디테일한 인물 설정을 한 것일까. 대체 어떤 사랑을 해온 것일까. 감탄을 멈출 수 없다.
입체적인 두 주인공의 감정에 집중
두 주인공의 관계는 상황과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하고, 또 그에 따라 싸움과 스킨십의 양상이 변하는데, 이 과정을 굉장히 디테일하고 현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리프탄과 맥시는 안정적인 정서를 지닌, 혹은 싸움조차 하지 않는 완전한 커플이 아니다. 오히려 정서적인 면에서는 현실의 연인들처럼 둘 다 방어 기제도 있고, 다혈질적인 기질과 나름의 고집도 있다. 그래서 리프탄과 맥시가 싸우는 장면들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연인이나 부부간의 싸움처럼 느껴진다. 남남으로 지내던 두 사람이 유일한 가족이 될 만큼 친밀한 사랑을 나누게 되면, 질투, 토라짐, 괜한 기대과 실망, 서운함, 걱정 등 비이성적인 감정이 둘에게만큼은 정당한 감정이 되기 마련이니까.
오로지 상대의 안위와 안녕만을 바란다는 강력한 이타심이 있음에도, 자신보다 상대를 우선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사랑함에도 오히려 그런 마음 때문에 다투는 연인의 모습은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남자가, 혹은 여자가 잘못한 것 같지만, 사실 이 싸움에 잘잘못은 없다.
그저 각자의 입장과 상황에서 서로를 위하는 것이다. 수많은 싸움을 통해 단단한 신뢰가 쌓여 마침내 방어 기제 없이 대화하게 될 때까지 서로 다른 문제 해결방식을 맞춰가고 설득하는 과정일 뿐이다.
열린 마음으로 애정 어린 시선으로
스토리의 대부분은 여자 주인공 맥시의 시점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초반에는 성별의 장벽도 있고, 좁은 시야로 소설 속 사건과 인물들을 바라볼 수 밖에 없겠지만, 결국에는 독자들이 리프탄과 맥시 양쪽 입장에 이입할 수 있도록 다양한 시점이 제공된다.
나의 감상을 기준으로 이야기를 해보자면, 초반에는 설레임이 독서의 원동력이 된다. 당당하고 멋진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현대 작품은 많지만, 그래서 오히려 모든 게 무섭고 낯선 맥시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나 역시도 언제나 당당하고 현명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약한 면을 맥시에게 대입하며 맥시의 감정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또한, 리프탄과 리프탄의 기사단이 얼마나 맥시의 집안에 깊은 원한이 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맥시를 (분노까지는 아니지만) 비호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초반부터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프탄은 줄곧 맥시와의 관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서툴게나마 다정함을 내비치며, 맥시도 처음엔 당혹스러워하지만, 점차 호흡을 맞춰간다.
리프탄의 급한 성격과 우물쭈물하는 맥시의 모습을 보고 ‘설명해주지‘ 혹은 ’답답하다‘라고 느낄 수 있는데 난 오히려 이런 두 주인공의 성격 차이와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오해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설정이 둘 사이를 더욱 설레고 애틋하게 만드는 듯해 더 즐겁게 읽었다.
2부 3분의 2까지 1차 감상을 마치고 다시 읽으면서 댓글을 보다가 안 사실인데, 등장인물에 대해 완벽히 이해가 되지 않는 작품 초중반에는 누가 좋다 싫다 의견도 많고, 거칠고 열정적인 스킨십에 대한 논쟁도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 할 만큼 리프탄도 맥시도 충분히 이해됐고, 수위 높은 스킨십신들도 개인적인 취향상으로는 전혀 불편함 없이 즐길 수 있었다. (야하기만 한 스킨십신에는 수위에 상관 없이 거부감이 있지만, 로맨스에 잘 녹아든 스킨십신에는 꽤 오픈 마인드인 편.)
초반에는 리프탄의 사정이 설명되지 않지만, 맥시에게 양가적 감정이 있다는 게 꽤나 명백하게 묘사되기 때문에 그의 거친 표현 방식에 집중하기보다 맥시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 바쁜 와중에도 반드시 맥시를 위해 시간을 내는 모습, 맥시에게 뭐든 다 해주려는 모습을 보면 캐릭터의 중심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맥시 역시도 현대 사회에서 이상적으로 그리는 여성상에 비교하면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초반에는 솔직하지 못 하며 작은 언쟁에도 쉽게 움찔거리면서도 의욕만 앞서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맥시에겐 모든 경험이 처음이고, 맥시의 억눌린 자아 아래는 한번도 발현해보지 못 한 열정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오히려 기특하다고 느낄 수 있다.
물론 이런 왈가왈부가 없더라도 댓글 보기 전의 나처럼 스토리에 집중해서 독서한다면 오히려 더 편안하게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TIPS)
감상 중에는 절.대.로. 댓글을 보지 말 것.
- 두 주인공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각자 편을 들어 싸우는 댓글이 태반이기 때문에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는데 방해가 된다.
현생이 한가할 때 읽을 것.
- 한 번 보면 멈출 수 없기 때문에 꼭 한가할 때 있기를 권한다. 몰입해서 읽으면 일주일 이내에 독파 가능하다.
- 다 읽고서도 여운이 너무 길어서 현생 몰입이 힘들 수 있다.
남자들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요소로 가득하다. 특히, 1부 중후반부부터. (판타지를 처음 읽는 남편도 내 추천으로 지지부진 읽다가 1부 중반부터 작픔에 푹 빠져 4일 만에 독파했다.)
**쓸 말이 너무 많아서 글 쓰기 힘들었던 적은 또 처음이네. 마음엔 안 들지만 일단 발행!**
**스포를 포함한 더 자세한 리뷰는 추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