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친해지기
사는 동안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근거를 성립하고 이유를 발견하는 행위는 인류가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디자인한 것이다. 마치 외부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건축물과도 같다. 이해할 수 있는 진리는 결과이지 과정이 아니다.
시련이 닥쳤을 때, 가장 힘든 이유는 내 안에서 질문이 반복될 때이다. 내게 왜 이런 시련이 왔는가? 내게 왜 이런 슬픈 일이 벌어진 것인가?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벌을 받는 걸까?
시련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운명에는 두 가지가 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작은 파동의 운명과 내가 선택할 수 없는 큰 파동의 운명이 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얼굴을 많이 다쳤다. 긴 세월을 살아온 내 정체성의 상징인 얼굴의 변형은 거울을 봐야 하는 세수조차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사람의 신체에 느껴지는 통증은 매일 봐야 하는 얼굴을 마주하며 느껴야 하는 정신적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거울을 보는 순간마다 나는 이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관한 무거운 질문으로 세상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분노가 일었다. 분노라는 감정은 슬픔이 입은 옷이다. 슬픔은 힘든 감정이 내 안에서 홀로 머무르는 것이라서 마주하기까지 두려움이라는 장애물이 있다. 그러나 분노라는 감정은 외부로 향하는 감정이기에 보다 쉽게 마주하게 된다. 나 혼자 슬픔에 잠기는 것보다는 어떤 대상을 향해 화를 내는 것이 보다 쉽기 때문이다.
결국, 결과는 도출되었다. 맥락을 이해하는 과정을 지나 그 진부한 진리의 종착역에 도착할 때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과 달라진 현상을 근거로 내린 결과는 단 하나의 문장이다.
'운명이 요구하는 대가는 오직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의 힘겨운 여정에서 운명에 대한 짧은 담론을 발견하고 운명을 거부하던 내 두려움이 힘을 잃게 되었다. 의과대학 산부인과 교과서를 열면 보이는 첫 문장이라고 한다.
"Bad things at times do happen to good people. 때때로 불행한 일이 좋은 사람들에게 생길 수 있다."
그렇다. 운명의 이유는 내가 그저 한 인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강석호 작가의 회고전에서 마주했던 인상적인 그림이다. 작가는 '관계'라는 테제가 회화라는 형식 이전에 사람에 관한 그 무엇일 거라고 말하며, 감상자에게 질문을 돌리고 있다.
나는 한 사람은 나 자신이고 다른 한 사람은 나의 두려움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와 내 두려움과의 관계, 운명을 받아들이는 순간 두려움은 동반자가 된다.
두 존재의 눈빛은 꽤 친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