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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석 Jul 19. 2023

도시, 재밌거나 감동적이거나

65/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미국 워싱턴DC-1)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      


   앙증맞은 트램이나 시야가 툭 터진 버스에 프리패스를 보여주고 올라타서 마음 내키는 곳에 내린다. 독특한 건축물과 조경이 신박한 공원 사이로 놀멍쉬멍 걷는 게 즐겁다.


   운 좋게 화려한 퍼레이드나 공연 중인 버스커를 만나면 눈과 귀가 호강한다. 따뜻한 햇살 만큼이나 표정이 넉넉한 사람들 틈에선 아무리 북적여도 좋다. 지치면 지천에 널린 맛집에서 배를 채우고, 기념품도 산다. 그리고 나선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에 오르거나, 회전관람차 같은 놀이기구도 탑승한다. 늦은 오후엔 왁자지껄한 야외테라스에서 맥주 한 잔 마셔본다. 몸이 피곤하면 짜증날 법도 하지만, 하루종일 축제 같은 분위기에 스트레스가 쌓일 틈이 없다. 아니, 연간회원권이 탐날 만큼 다음에 또 오고 싶다.


   롯데월드나 에버랜드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여행을 하며 알았다. 놀이동산에나 가야 느낄 수 있었던 즐거움과 재미가 지금 살고 있는 도시에서도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물론, 모든 도시가 재미로 넘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끊임없이 오감을 만족시키며 탐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도시를 만났을 때 아드레날린은 미친 듯 솟구친다.


   이런 도시는 대개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느낌이 팍 온다. 도시를 구성하는 어떤 요소가 그 느낌을 만드는지 콕 집어내긴 어렵다. 그만큼 도시의 이미지는 직관적이고 감각적이다. 그래서 도시는 사진이나 글로 읽어낼 수 없다. 직접 가봐야 한다. 특히나 선입견이 없는 아이들의 반응은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2019년, 둘째 아이와 배낭여행을 갔다. 목적지는 코카서스 3국으로 불리는 아르메니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이다. 이 여행엔 사연이 있다. 맞벌이를 하며 아들 셋과 매일 씨름을 하고 있으니 온전히 한 아이에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말을 알아듣기 시작할 무렵 가족회의를 열었다. 그래서 낸 결론. 아빠와 한 명씩 둘만의 배낭여행을 하기로 했다. 이유는? 너희가 태어나서 열 살까지는 부모가 너의 인생을 100% 책임지지만, 그 이후부터 십 년간은 자기 자신과 부모가 반씩 공동 결정, 공동 책임을 지고, 스무살부터는 완전히 네 인생이다. 그러니 네가 너의 반쪽을 찾는 열한 살이 되면, 그 기념으로 함께 합을 맞춰보자고 했다. 그렇게 첫째와 미얀마를, 둘째와는 코카서스를 여행했다. (셋째와는 코로나19 탓에 미루다가 2022년 호주를 다녀왔다) 그사이 아이는 한 뼘 더 컸고, 우리는 매일 붙어 다니며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값진 추억을 가득 담아 돌아왔다.     


   그렇게 만난 도시가 예레반과 트빌리시다. 각각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의 수도다. 두 나라는 로마에 앞서 기독교를 공인한 첫 번째와 두 번째 국가다. 민족이나 언어도 비슷하고, 터키와 소련의 지배를 받은 역사도 공통이다. 1인당 국민소득마저 모두 4천 불 내외이다 보니 사람들이 사는 방식도 별 차이 없을 거라 넘겨짚었더랬다.


   차분한(아이 입장에서는 지루한) 분위기의 예레반을 떠나 늦은 오후 트빌리시에 도착한 직후부터 아이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형형색색의 집들에 꼬불꼬불 골목길, 마치 동화나라에 온 듯하다.


   삼면을 산으로 두르고 강을 따라 초승달 모양으로 옹색하게 자리한 도시는 사방이 구릉이다. 그러니 강변도로 외에는 노천카페가 이어진 보행자 도로가 사방으로 연결되어 도시 전체가 들썩인다. 유서 깊은 온천지구에서 목욕을 하고 나와, 케이블카를 타고 언덕에서 야경을 구경했다. 솜사탕 하나 들고 이번엔 보트를 탔는데, 같이 탑승한 사람들도 흥에 겨웠는지 노래를 부른다. 꽤 프로의 냄새가 나길래 물어보니 우크라이나 합창단이란다. 정말 하루하루가 신났다. 많이 걸으면 투덜대던 아이도 이번엔 밤늦게까지 씩씩하게 앞장선다.      


(사진8-1. 조지아 트빌리시의 구시가 온천지구 ©이경석)


   예레반은 억울할 만도 하다. 자칭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 주장할 만큼 역사도 만만치 않다. 근교엔 유적도 풍성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됐을까?


   20세기 초만 해도 인구 3만 명의 조그만 도시는 1920년 무렵 10만 명 이상으로 급성장했다. 1915년 오스만제국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피해 난민이 몰린 결과다. 도시기능이 마비되자 1924년 소련 정부는 첫 번째 도시개조 대상으로 예레반을 지목했다. 이때 도시가 완전히 바뀐다.


   이를 총지휘한 건축가, 타마냔은 영국의 가든시티 개념(57화 참조)에 사회주의 체제의 상징성을 적절히 섞는다. 원형의 외곽도로가 신설되고 그 안에 몇 개의 거대한 광장과 거기서 뻗어나가는 넓은 도로들이 뚫렸다. 도시의 중심축을 남북으로 설정하고, 지대가 높은 북쪽부터 차례대로 스탈린 광장 - 오페라극장 – 보행자거리 – 레닌광장을 계획했다. 시간이 흘러 스탈린 광장 자리에는 현재 캐스케이드라 불리는 계단식 야외조각 콤플렉스가 조성되었다. 레닌광장도 공화국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지만 개조 당시의 도시골격은 그대로다. 개조 과정에 사라진 골목길과 철거된 역사적인 건축물을 다시 돌이킬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였다면 예레반이 그저 그런 도시로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주민의 삶을 볼모로 체제 과시의 수단이 된 도시는 웬만해선 그 바깥의 이방인에게 별 감흥을 주지 못한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 건, 도시에서 가장 높은 캐스케이드 꼭대기에 올랐을 때다. 발아래 시원스럽게 뻗은 축을 따라 남쪽으로 내달린 시선에 꽂힌 게 있었으니, 바로 아라랏트산이었다.      


   해발 5,137m인 이 사화산이 유명한 건 구약성서의 무대여서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아라랏트산은 홍수가 끝나고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곳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노아가 육지로 첫발을 내디딘 후 ‘예레바츠(찾아냈다)!’라고 뱉은 외마디가 예레반의 기원이 되었다고 믿는다. (심지어 예레반 북쪽 에치미아진 성당에는 방주 파편이라 주장하는 조각도 보관되어 있다)


  따라서 아라랏트산은 아르메니아의 백두산이요, 노아는 단군과 같은 민족 시조다. 민족정신의 뿌리로 대접받는 아라랏트산이지만, 정작 아르메니아인들은 갈 수 없다. 앙숙인 터키 땅이기 때문이다. 한때 아르메니아 땅이 될 뻔한 순간도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패전국 오스만제국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맺은 셰브르 조약이 제대로 발효만 됐더라도 말이다. 아르메니아 입장에선 몇백 년 만에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놓쳤으니 많이 안타까울 만하다.


   가질 수 없으면 더 집착하는 게 세상의 이치다. 아라랏트산이나 아라랏트란 이름은 이제 아르메니아의 국장에서부터 호텔, 레스토랑, 기업, 그리고 담배와 꼬냑의 상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만날 수 있다. 가히 광적이다. 이 정도의 애정이라면, 도시를 계획할 때 허투루 다뤘을 리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캐스케이드 위에서 본 예레반은 너무나 평온하게 아라라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잃어버린 땅이지만 마치 도시의 뒷산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까이 끌어당긴 것이다. 왜 타마냔이 남북으로 길게 축을 빼고 그 축의 끝이 아라랏트를 향하도록 했는지 이제야 깊은 속뜻을 이해했다. 도시의 중요 축 상에 사회주의 상징물을 배치하고 이름을 붙였지만, 그 바탕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오랜 염원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예레반이라는 도시가 깊숙이 간직한 보물 하나를 찾은 기분이었다.              


(사진8-2. 아르메니아 예레반의 타마냔 동상과 그 뒤의 캐스케이드(구 소련 시절 스탈린광장 자리) ©이경석)
(사진8-3. 캐스케이드 꼭대기에서 본 예레반 시내와 아라랏트산, 저 멀리 구름처럼 보이는 설산이 아라랏트산이다 ©이경석)

 

   모든 도시는, 재미가 있든 없든 저마다 철학을 담고 있다. 가령,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스부르크는 같은 나라의 도시라 믿기 어려울 만큼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모스크바는 원래 성벽이 4중으로 둘러쳐진 방어요새였다. 후에 철거된 성벽 자리에 순환도로가 놓였다. 자연스레 형성된 동심원 구조는 시내지도나 지하철 노선도에서 잘 드러난다. 동심원의 중심에는 ‘크렘린궁’과 ‘붉은 광장’이 있다. 마치 양궁의 과녁 정중앙 빨간 부분처럼 그 위치가 주는 상징성과 무게가 장엄한 공간을 탄생시켰다. 이민족의 약탈로부터 생명을 부지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 반영된 강력한 중앙집중식 도시구조는 한편으론 권위적이고 폐쇄적일 수밖에 없다. 꽁꽁 숨겨진 이곳이 소비에트 연방의 심장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사진8-4. 좌 : 모스크바 도로망지도 ©ml.m.wikipedia.org, 우 : 오른쪽에 크레믈린궁이 자리한 붉은 광장 ©이경석)


   사회주의 혁명 직전의 수도는 상트 페테르스부르크였다. 피터 대제가 늪지대를 메워 만든 계획도시다. 도시의 중심은 지금 에르미따주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겨울궁전이다.


   그런데 도시공간이 모스크바와는 완전 딴판이다. 네바강을 북쪽에 끼고 강변에 자리한 궁전을 기점으로 3개의 직선도로가 방사형으로 뻗어나간다. 그 도로의 끝에는 기차역이 자리한다. 거기에 ‘모스크바역’이나 ‘바르샤바역’(지금은 철도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이 있다. 특이했다. 기찻길의 종착역이 위치한 도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서울에는 부산역이 있고, 부산에 가야 서울역이 있는 셈이다. 도시가 대로를 따라 기차역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기찻길로 연결된 다른 도시까지 확장된다는 의미다. 매우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구조다. 서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여 조국 러시아를 근대화시키고자 했던 대제의 포부와 야심이 그대로 녹아있다.      


(사진8-5. 좌 : 상트페레르스부르크 지도, 우 : 도시의 시작점인 겨울궁전(현 에르미따주 박물관 ©이경석)


   세상에 우연은 없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그냥 관심이 없거나 모르고 지나쳤을 뿐이다. 도시는 말이 없다. 그러니 여행자인 내가 말을 거는 수밖에 없다. 보고 듣고 찾아내야 한다. 그러다 뜻밖의 정체성과 맞닥뜨리는 순간에 느껴지는 전율은 감각적인 재미와는 또 다른, 관념적이고 지적인 감흥을 선사한다.      


   지금 가고 있는 미국에도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두 도시가 있다. 바로 뉴욕과 워싱턴 DC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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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



[사진출처]

사진8-4좌 : https://ml.m.wikipedia.org/wiki/%E0%B4%AA%E0%B5%8D%E0%B4%B0%E0%B4%AE%E0%B4%BE%E0%B4%A3%E0%B4%82:Central_Moscow.svg

사진8-5좌 : https://bestofsaintpetersburg.com/a-collection-of-saint-petersburg-tourist-and-transport-ma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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