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80 템플기사단 비밀 맛집 여행(미국 워싱턴DC-2)
뉴욕 JFK 공항에 착륙한다는 기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장시간 비행으로 컨디션은 메롱이었지만,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밤 9시가 넘었다. 야밤에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만큼은 피하는 게 내 배낭여행 철칙이었다. 하지만 지킬 수 없는 경우가 왕왕 있었고, 불미스런 사건은 그때마다 여지없었다. 때론 목숨을 위협할 만큼 심각했다. 하물며 뉴욕이었다.
내 머릿속 뉴욕은 이미 무법천지였다. 택시 기사가 승객을 유인해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음침한 뒷골목에선 갱들이 마약과 총질을 해대는 곳이었다. 무표정한 뉴요커들과 칙칙한 고층건물, 유령이라도 튀어나올 듯 그래피티로 도배된 지하철은 너무 식상했다. 아무래도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이다. 그래서인지 뉴욕은 난생 처음이지만 데자뷔를 느낄 정도로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어딘지 모를 불안한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공항버스는 점점 지옥의 묵시록 한가운데로 돌진 중이었다. 어디서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이라도 흘러나왔다면 순간 욱~ 할 뻔했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버스터미널이 있는 맨해튼 42번가에서 숙소가 있는 49번가까지 어떻게 갈지 고민하며 나는 공항버스 안에서 십 년은 늙고 있었다. 걸어서 고작 10분 거리지만, 평범한 얼굴을 하고서 나를 납치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게 뻔한 싸이코패스와 갱스터들을 따돌리고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도 여행 중에 종종 마주치는 이런 상황에서 나름 터득한 필살기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최대한 현지인처럼 행동하는 거다! ‘애걔~’ 할 수도 있다. 효과가 검증됐을 리는 더더욱 만무하다. 그냥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 일종의 자기최면 같은 거다. 겁이 나면 강한 척이라도 하는 게 나쁠 건 없었다. 갈림길에서 멈칫하거나 걸음을 멈추고 지도를 보는 멍청한 짓은 금지다. 여기 오래 살았던 뉴요커처럼 조금 과장된 몸짓과 빠른 걸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돌진해야 한다. 그러다 누가 수작이라도 부릴라치면 <호밀밭의 파수꾼> 속 주인공처럼 눈을 부라리며 쏘아붙일 삐딱한 말투도 연습해둔다. 이제 남은 건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재빨리 동서남북 좌표를 확인해 돌진할 방향을 파악하는 순발력과 숙소까지 가는 경로를 통째 외우는 암기력이다.
드디어 버스터미널.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그런데 흠......! 뭔가 이상했다. 내 눈 앞에 펼쳐진 뉴욕은 한눈에 보기에도 펄펄 끓어 넘치고 있었다.
아이슬란드의 백야 축제라도 온 줄 알았다. 거의 1년 전이었다. 레이캬비크 중심가 유스호스텔에서 자다가 뭔가가 웅성거리는 소리에 살짝 잠을 깼다. 처음엔 꿈인가 했다. 들릴 듯 말 듯 귓가를 맴도는 환청은 분명 낮게 깔린 요정들의 속삭임이었다. 새벽 3시. 참을 수 없는 궁금증에 눈을 떴다. 조근조근한 말소리가 계속되는 걸 보니 분명 꿈은 아니렸다! 어느새 나는 요정을 찾아 침대 밑이며 벽장 안을 뒤지고 있었다. 급기야 암막 커튼을 걷는 순간 동공지진 발생! 거리를 빈틈없이 메운 사람들이 맥주잔을 들고 웃고 떠들며 춤추는 게 아닌가!
새벽 6시, 다시 눈을 떴을 땐 쓰레기 하나 남김없이 모두가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으니, 내가 본 게 진짜 꿈이었는지 아직도 헷갈린다. 그 신기루를 4천km 떨어진 뉴욕에서 다시 만났다. 음악이 사방에서 지글거렸고, 여기저기 폭죽처럼 까르르 터지는 웃음소리가 일으킨 파문으로 오월의 밤공기조차 일렁거렸다. 까뮈가 <페스트>에서 묘사한 전염병이 사라진 날의 광경처럼, 모두들 오늘이 앞으로 남은 날들에 마지막 생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떠 있었다. 쉑쉑버거 앞에 길게 줄 선 사람들이 재잘거리며 만드는 화음은 현란한 쇼윈도우와 야간조명을 배경으로 영락없는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였다. 어느덧 무장해제된 마음을 따라, 발걸음도 탭댄스를 춘다. 굳이 ‘뉴요커처럼’ 행동할 필요가 없었다. 이 분위기에서는 뭘해도 뉴요커였다. 와우~ 진심 그냥 신났다.
(67화에서 계속, 글이 괜찮았다면 '구독하기'와 '좋아요'를 꾹~눌러주세요~!)
*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