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에 대하여
일주일 전에 호텔에서 편지를 썼습니다. 같이 여행 온 그에게 쓰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행이 끝나면 한동안 못 볼 사람이어서요.
온갖 가재도구가 늘어선 그의 호텔방 책상에 비좁게 자리 잡고 A4용지 위에 글을 적어나갔습니다. 이름을 적고, 편지를 쓰는 이유를 적고, 너 없을 계절에 대한 슬픔을 묻히고 다시 만날 날까지 잘 지내라고 소박한 축복도 하고…. 생각보다 금방 썼습니다.
잘 쓴 것 같았습니다. 왠지 마음이 든든하고 당당해져서는 침대에 앉아있던 그에게 바로 줄까 싶었습니다. 그도 편지가 궁금한 눈치였습니다. 하지만 기대감을 키우기 위해 며칠 뒤에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그때 주겠다- 그리 말하고 내 방으로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샤워를 하고 흰 수건으로 몸을 둘둘 말아 내 방 책상에 앉아 그 편지를 읽어봤습니다. 뭔가 이상했습니다. 머리를 말리고 세면대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주워 버리고는 다시 그 편지를 읽어봤습니다. 서서히 깨달음이 온몸을 조여오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읽어보니 왜 이상했는지 알았습니다. 그냥, 참 못 쓴 편지였습니다. 필체가 엉망인데 크게도 쓰니까 한층 유치하게 느껴졌습니다. 갑자기 슬퍼했다가 축복했다가 인터넷 밈까지 나오니 정신이 오락가락한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고요.
이미 주겠다고 했는데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쓰기는 또 싫었습니다. 게으름뱅이가 어디 가나요. 회가 맛있듯이 날 것 그대로가 더욱 순정인 법이지. 괴상한 합리화를 하고서 여권이 들어있는 가방 구석에 편지를 넣어두고는 이부자리에 눕자마자 그것을 잊고 말았습니다. 원체 잘 잊어버리는 성격입니다.
이틀 뒤, 몇 시간의 비행 후에 어느새 거대한 인천공항에 도착해있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캐리어를 데리고 어느 게이트 의자에 앉아 각자의 공항버스를 기다렸습니다. 그때 뭔가 줘야할 게 있다는 게 떠올랐습니다. 공항버스가 오기 직전이었습니다. 가방을 뒤적거리다가 접어놓은 편지를 겨우 발견했습니다. 편지 깜빡하고 못 줄 뻔했네, 활짝 웃으며 그 편지를 주고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이제 한동안 못 보겠지, 잘 지내. 너도.
편지가 조악하기 그지없었음을 깨달은 건 버스가 인천을 벗어났을 때였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걸 줄 생각을 했을까. 사실 아무 생각도 안 했기 때문에 줄 수 있었습니다. 그는 편지를 공항에서 읽어보았을까. 귀가해서나 읽어볼까. 읽지 말라 부탁해볼까….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벌써 건네준 편지였습니다. 유학에 실패하고 집에 돌아가는 게 내키지 않는 망나니 자식마냥, 버스에서 자꾸만 한숨을 쉬었습니다.
문장 하나하나에 목숨 걸고 쓰는 낭만파는 아닙니다. 하지만 편지에는 꽤나 진심입니다. 이 허접한 발신인에게도 이상이 있거든요. 이 오랜 이상은 바로 이상입니다. 말장난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이상’입니다.
작가 ‘이상’이, 애인과 함께 몰래 만주로 떠나버린 여동생 ‘옥희’에게 쓴 편지를 압니까?
어렵고 난해한 문학으로만 그를 알았던 나에게 이 편지는 그야말로 반전이었습니다. 편지의 초중반, 여동생이 애인과 몰래 떠나버린 그 현장에 대한 묘사와 그에 대한 서운함과 어찌나 생생한지! 나까지 있지도 않은 여동생과 헤어진 것 같습니다. 그는 철없던 동생이 자기도 가지 못한 먼 세계에 있는 감회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 (…) 삼 남매의 막둥이로 내가 너무 조숙(早熟)인 데 비해서 너는 응석으로 자라느라고 말하자면 ‘만숙(晩熟)’이었다. 학교 시대에 인천이나 개성을 선생님께 이끌려가 본 이외에 너는 집 밖으로 십 리를 모른다. 그런 네가 지금 국경을 넘어서 가 있구나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난다.
어린애로만 생각하던 네가 어느 틈에 그런 엄청난 어른이 되었누. 」
그 뒤에는 부모님이나 사회 풍조와 다르게 열린 마음으로 동생의 행동의 이유를 헤아려보기도 합니다. 세상살이에 대한 따끔한 당부도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부분이 가장 유명합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고, 압도되었던 부분입니다.
「 (…) 이해 없는 세상에서 나만은 언제나 네 편인 것을 잊지 마라. 세상은 넓다. 너를 놀라게 할 일도 많겠꺼니와 또 배울 것도 많으리라.
축복한다.
내가 화가를 꿈꾸던 시절 하루 5전 받고 모델 노릇 하여준 옥희, 방탕 불효한 이 큰오빠의 단 한 명밖에 없는 이해자인 옥희, 어느덧 어른이 되어서 그 애인과 함께 만 리 이역 사람이 된 옥희, 네 장래를 축복한다.
이틀이나 걸려서 이 글을 썼다. 두서를 잡기 어려울 줄 알지만, 너 같은 동생을 가진 세상의 여러 오빠에게도 이 글을 읽히고 싶은 마음에 감히 발표한다. 내 충정만을 사다오.
-닷샛날 아침, 너를 사랑하는 큰오빠 쓴다 」
그의 문장은 참 담백합니다. 활자만 읽으면 근대의 ‘모던 보이’처럼 쿨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동생을 향한 따스함의 숨결이 백 년이 지나서도 또렷이 느껴집니다.
특히 축복은 이 편지를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축복한다.”라는 네 글자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찬란히 먹먹해집니다. 치기와 충동, 어리석음으로 비난했을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외칩니다. 세상은 넓고 놀라운 일들이 많아. 그 안에서 네가 행복하기를 축복한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 축복이 아닐까요. 수신인 옥희 씨가 지면에 소개된 이 편지를 읽고 어떤 기분이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불멸의 문학이 된 이 편지의 미래의 한 수신인으로서 나는 그 축복의 기운을 받습니다.
이상의 편지는 두고두고 나의 이상이 되었습니다. 누군가와 작별할 때 꼭 저런 편지를 줄 수 있다면. “이해 없는 세상에서 나만은 언제나 네 편인 것을 잊지 마라.” 이 말에 담긴 굳건함으로 그의 편이 되어주어 이 마음을 문장으로 맹세하고 편지로 써주기를 그려왔는데… 그에게 그러한 멋진 편지를 줄 기회를 살리지 못해서 버스에서 내내 기운이 빠지고 만 것입니다.
오랜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타국 땅의 공기를 지우는 게 조금 섭섭하기도 했지만 머리도 야무지게 감고요. 오랜만에 나의 방 침대에 누워 카톡을 보는데 그가 집에 잘 도착했다는 말 이외에는 편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 없었습니다. 별 내용 없는 것을 느꼈나보다. 답장을 주기도 애매하다고 느꼈구나. 사려 깊은 사람이니 사려 깊게 판단해서 아예 말도 꺼내지 않기도 했나보다. 살짝 씁쓸하게 잠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에게 편지를 줬다는 것을 잊어가고 있었는데 카톡이 왔습니다.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글이었습니다. 여섯 문장쯤 되었을까요. 대강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편지 잘 읽었어. 읽고 울어버렸어. 너에게 앞으로 잘할게. 답장을 보낼까말까 하다가 조금이라도 이렇게 남긴다. 고마워.
으앙.
나는 울었습니다. 흔한 편지 답장 같은데요. 투박하고 일상적인데요. 그냥 눈물 났습니다. 도대체 편지란 무엇인지. 답장이 뭔지. 답장을 쓴 그가 이제는 발신인입니다. 나는 수신인이 되었습니다. 나는 답장을 받는 것을 잊으려고 했지만 사실 몹시 기다리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의 답장도 나의 편지처럼 별 거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적은 글덩이가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왜 감동이고 위안이 되는지요. 문득 이상이 연고도 없는 동경(도쿄)에 도착해 외로이 있을 때에, 일본 다른 지역에 유학하던 김기림*에게 보낸 편지의 한 문장을 반추해봅니다.
*당시 이상과 친했던 시인이자 평론가
「 나는 이곳에서 외롭고 심히 가난하오. 오직 몇몇 장 편지가 겨우 이 가련한 인간의 명맥을 이어주는 것이오. 」
이상은 이런 편지를 여러 번 김기림과 주고받았는데, 김기림은 이상보다 훨씬 바빴으리라 짐작되니 답장은 그리 긴 편지도 아니었겠지요. 내 편지에 온 카톡처럼요. 하지만 뭐랄까, 단지 나는 그가 자신의 존재의 기척을 짧게라도 담아 보내오는 것만으로도 기적적이라서 놀랍도록 감사해지고 말았습니다. 마치 나의 가냘픈 명맥이 간신히 이어지기라도 한 것처럼요.
나는 답장을 받은 그날 디지털로 전송된 검정 활자들을 가득 안고서는 생각했습니다. 나, 발신인의 이상은 근사한 편지를 쓰는 것이다. 이상이 옥희에게 썼던 그 유명한 편지처럼. 그러나 잘 쓰는 건 오롯이 나의 문제일 뿐이다. 외딴 동경의 이상, 그 발신인의 이상처럼 모든 게 맞아떨어져야만 이루어질 법하고, 어쩌면 절실히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을 진정한 이상. 그런 게 있다면,
-나의 수신인이 나의 발신인이 되어주는 일일 거야.
유안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