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많아 상담도 많이 했었고, 늘 웃어줘서 긍정의 아이콘인 회사 동료가 배 타고 제주여행을 다녀오라고 추천한다. 배에서 바라보는 이른 아침 제주풍경이 한 번은 경험해 볼만한 또 다른 제주 여행의 맛이라는 얘기에 서둘러 구글 캘린더를 열어 메모를 기다리는 칸을 찾아 먹을 거 챙겨주는 듯 배편을 예약하고여정을 기록했다.
여태껏 제주도 여행은 늘 사연을 안고 다녀왔다. 신혼여행이 처음이고, 회사에서 친한 동료들과 야유회로 그리고 부모님 효도 관광으로 다음은 결혼 30주년 기념 등 일일이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사연을 쫓아보니 대충 이 정도다. 매번 목적이 분명한 탓에 자유로운 여행은 없었고, 핵심 정리가 잘된 전과로 공부하듯이 제주도를 둘러보곤 했다. 한마디로 방학숙제 하듯이 유명한 곳은 다 가봤다. 이번에는 얼떨결에 잡은 스케줄이라 오로지 첫날만 숙소를 예약하고 출발하기로 맘먹었다. 다음 일정을 예약 못할 정도로 바빴기보다는 자유롭게 다니며 거처를 정하자는 의미였다.
이러한 계획을 아내에게 알렸더니 한라산 등반을 하고 싶단다. 부랴부랴인터넷을 뒤져 백록담 산행 방법을 보니 성판악이나 관음사 쪽에서 등산은 사전 예약을 해야 하고, 그에 따라 출발 시간도 몇 차례로 나뉜다고 한다. 첫날 숙소만 정한 터라 배에서 내리면 뭘 할까 생각 중이었는데 산행 예약 시간과 얼추 맞아서 별 고민 없이 한라산 등산을 하기로 했다. 한라산이 그다지 어렵다는 생각이 없었고, 이번 여행이 성급히 결정된 탓에 편도 10킬로 미터라는 안내가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고, 그러한 정보들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륙의 유명한 산들을 다녀봤기 때문에 비슷한 정도일 거라 생각한 거 같다.
예정대로 완도여객터미널에서 02:30분에 배가 출발했다. 12시 반경에 차를 싣고 어묵 몇 개로 속을 달래면서 기다려야 하는 불편함 정도는 여행의 들뜬 마음으로 감수해야만 했다. 차를 실으면서 놀랐던 일은 트럭이 그렇게 많이 배를 탄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대형 냉동 탑차들이 거의 대부분을 채우고 승용차는 크기도 작기 때문에 덤으로 실리는 듯하였다. 생각해 보니 냉동 탑차를 배로 실어 나는 방법은 가히 획기적인 물류시스템의 변화였을 거 같다. 저 많은 또는 저 다양한 화물들을 부두까지 실어 날고 내렸다가 다시 배에 싣고 내렸다가 섬에 있는 차에 옮겨 싣고 목적지로 배송했을 것을 생각하면 배송 기일이나 냉장 유지 등이 어마어마하게 어려웠을 것 같았다. 생산지에서 바로 차에 싣고 그 차를 배로 실어 나르고 섬에 도착하면 차들이 여기저기 다니며 목적지에 물건을 내려놓으면 상품들은 한번 싣고 한번 내리기에 손을 타지 않고, 냉동차이므로 온도 변화도 격지 않으므로 모든 것이 순조로워진다. 싱싱한 육지 상품들을 신선하고 종류도 다양하게 맘껏 즐기는 섬이라면 살아봄직 하겠다.
이런 생각들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데 불편한 의자에서 몇 시간 버티기에는 무리다. 한참이 지났으려나 하고 시계를 보니 겨우 한 시간 지났다. 밖은 깜깜하고 비도 약간 뿌리고후덥덥하여 뱃전에 나가 있을 수 없어서 안에서 의자에만 앉아있다보니 이런 자리를 예매했냐는 아내의 투정을 더아픈 허리 통증으로 지울 수밖에 없었다. 가는 시간이 얼마 안 되니 밖에서 밤하늘 보다가 잠깐잠깐 들어와 앉아 있으면 되니까 침실로 하지 말고 의자로 예매해도 충분하다는 얘기를 들어서 그렇게 한 건데 실수였다. 아마 연령층에 따라 또는 날씨에 따라 의자로 할 건지 침실로 할건지 선택해야 할거 같다.
주의사항) 밤엔 누울 자리가 필요하다. 의자로 예약할지 침대로 예약할지 논의할 것
배는 벌써 제주에 도착하는데 장마철 때문인지 일출의 멋진 장면이 없었다. 하늘 전체적으로 여명이 있더니 이내 밝아져 버렸다. 배에서 바라다본 제주는 기대보다는 밋밋했다. 워낙 커서 아득히 보인다거나 하는 장면도 없었고, 내륙의 먼산 보듯이 눈에 들어왔다. 항구도 영화 속의나폴리처럼 멋있거나 출장 가며 들렀던 호주의 오페라하우스 옆에 서큘러 퀘이항처럼 규모가 있지도 않아서 감동스럽지 않고, 화물을 싣고 내리는 분위기의 삭막한 부두였다. 통과의례처럼 화물 트럭 뒤를 따라 차를 내리고 제주 여행을 시작한다. 언제 어떻게 산행을 시작할지 몰라 아침식사 간판도 무시하고, 김밥 간판도 뒤로하고 성판악 주차장을 향해 곧바로 달렸다.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성판악 주차장은 매점이나 식당이 없단다. 허기도 해결해야 하고 산행 준비물도 구비해야 하는데 주차장만 운영하다니.... 지나쳤던 간판들이 그렇게 밝게 빛을 내고 있었던 이유가 있었구나 싶었다.
주의사항) 성판악 주차장은 매점이나 식당 운영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늦으면 자리가 없다. 제주 국제대 환승주차장에 차를 대고 버스나 택시를 타야 한다.
이번 산행의 고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차를 갖고 지나쳐온 길을 되돌아가자니 주차자리가 없어지고 버스로 다녀오자니 시간이 아슬아슬하고 택시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고... 순간 암담했다. 그런데 마침 281번 버스가 와서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올라탔다. 사정을 설명하니 반대편 버스를 탔으면 좀 더 가까웠을 거라 하면서 가게를 만나려면 돈내코 입구까지 한참을 가야 한단다. 어쨌든 덕분에 편의점을 찾았고 거기서 간편식으로 아침을 때우고 과자랑 물을 사서 담고 다시 반대편에서 버스를 타고 성판악에 도착했다. 여전히 편도 십 킬로미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물도 생수 하나씩 그리고 초코바 한 개씩 사탕 한 봉지, 초코파이 세 개 정도를 배낭에 지고서는 마음 든든해했다.겨우 시간을 맞춰서 첫 등반 시간 마지막 손님으로 산행을 시작했다.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체력이 빵빵한 상태라 무리 없이 다른 사람들 보다 30분 정도 늦게 정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백록담은 장관이었고 구름을 발아래 둔 경치는 그야말로 끝내줬다.
하산 마감시간은 오후 두 시였다. 올라오느라 고생한 게 아까워서 내려가라고 재촉하는 방송이 나올 때까지 이곳저곳을 서성이기도 하고 멍 때리며 백록담을 내려다보며 놀았다. 그러다 정말 록담의 뜻과 같이 분화구 호숫가에 사슴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워하며 사슴 노니는 모습에 눈길을 박아두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미련이 남지만 하산을 재촉하는 방송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관음사 방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곧 우리는 이쪽으로 내려오지 않았으면 반을 못 본 격이다 생각하며 감동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올라온 쪽이 평온한 능선길이고 전라도 산행길이라면 이 길은 기암괴석과 절벽이 만들어내는 장관 그리고 길게 늘어진 산맥이 병풍처럼 펼쳐지는 험준한 강원도 산행길 같았다. 한참을 구경하며 내려가는데 대부분 데크와 계단이 많아서 올라오느라 힘들었던 발목 그리고 허벅지 근육에 무리를 많이 줬다. 절반쯤 내려왔다 싶었을 때가 겨우 3분의 1 지점이었고, 여기서부터 길게 늘어진 하행길은 우리의 준비가 너무 서툴렀음을 일깨웠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고 다리는 더 이상 내딛기 힘들 정도로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여 오래 걸렸다. 한마디로 죽을 거 같다 싶을 정도에 관음사에 도달했는데 시간이 어두워진 저녁 7시였다. 보통 내려오는 길은 절반 혹은 3분의 2 정도 시간이면 충분했는데 올라가는 시간보다 더 걸린 느낌이다. 내려오는 10킬로미터는 오르면서 지친 몸 때문인지 준비하지 않고 도전하기에는 쉽지 않은 거리다.
주의사항) 내리막 길이 길어서 이때 필요한 식수와 간식을 별도로 챙겨야 하고, 지팡이는 필수이고 무릎 보호대는 옵션으로 있으면 좋겠다.
백록담 산행은 힘들어서 준비하지 않으면 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오히려 몰랐기 때문에 멋모르고 잘 다녀왔다. 재수 좋게 날씨도 좋아서 백록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다만 너무 힘들었다. 체면만 없다면 눈물 찔끔 쏟아내었을 것이다. 앞으로 가실 분들은 준비를 잘해서 구경도 잘하고 산행도 무리 없이 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