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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Dec 15. 2023

침묵하는 말들, 기다림의 말들.

김혜진 장편소설 <경청>

인간이 발명한 것 중 가장 위대한 것, ‘언어’가 아닐까. 언어를 통해 대화할 수 없었다면 인간은 지금과 같은 발전을 이루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 속에서 자주 경험하듯 언어만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없다. 말과 글은 마음의 의도만큼 담기지 않고, 담긴다 한들 타인에게 온전히 전달되기 어렵다. 타인은 내가 아니며, 마음속 무수한 감정들과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것까지는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김혜진 작가의 장편소설 『경청』은 이러한 언어의 불완전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울러 인간이 언어의 불완전함을 인식하지 못할 때 파생될 수밖에 없는 혐오와 배제의 문제를 낙인찍기, 댓글테러, 따돌림 등과 같은 일상적이면서 사회적인 사건과 버무려 그려내고 있다. 인간의 언어가 불완전한 것이라면 그것을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까? 소설은 그것에 대한 답을 등장인물 임해수의 심리 변화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임해수는 처음부터 피해자의 얼굴로 나타난다. 그는 한동안 유능한 심리상담사로 일했으나 뜻밖의 사건을 겪은 후 해고되어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게 살고 있다. 보내지 못할 편지를 쓰고, 그것을 버리기 위해 매일 밤 산책을 나간다. 그가 쓴 편지들은 자신을 낙오하게 만든 이들에게 보내려는 것이다. 편지는 억울함과 울분을 토로하는 내용이며 그마저도 온전히 담기지 않아 매번 실패하는 글이다. 사람들 속에서 그들이 표현하는 말의 의미를 밝히며 자신만만하게 살아왔던 해수. 이제는 자신의 심경을 담은 편지 한 장도 쓰지 못할 만큼 막막한 언어의 벽에 갇혀 있다.       


상담사였을 때 그녀가 상대한 건 오로지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 사람들을 지배하는 기분. 그녀는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믿음이 감정과 기분에 휘둘리는 사람들에게 자신감 넘치는 조언을 하게 했다. (중략) 오직 인간적인 것들로만 가득 차 있던 삶. 완벽하게 인간적이었던 삶. <『경청』김혜진, 민음사, 28쪽>     


그 견고한 벽을 무너뜨린 것은 뜻밖에도 길고양이 순무를 만나면서부터다. 순무는 주변을 경계하느라 몹시 사나워진 길고양이로 이미 많이 다쳐 걷기도 힘든 상태였다. 해수는 순무의 먹이를 챙기기 시작한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다친 몸으로도 싸움을 피하지 않는 거친 순무를 지켜보며 해수의 삶은 조금씩 봉합되기 시작한다. 한순간 순무와 눈빛을 교환하는 것으로 우정 어린 마음을 나누기도 한다. 언어가 지배하는 인간적인 세계 속에서 살아왔던 해수는 말 못 하는 길고양이 순무와의 관계를 통해 삶의 방향이 바뀐다. 


그것은 해수 자신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위악적으로 살아가면서, 그악스럽지만 약한 순무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한 것으로 보인다. 상처투성이면서도 도움을 바라지 않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다친 몸으로 싸우며 살아가는 거친 순무에게서 해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한 자신에게 경멸을 느끼면서도 말이다. 해수가 길고양이 순무의 안녕에 집착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공터에 통덫을 설치한 뒤 순무에게 집중할수록 그의 울분은 차츰 가라앉는다. 구원받는 것은 오히려 해수 자신이다. 그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침묵을 지키며, 서둘러 판단하지 않고 지켜볼 수 있게 된다. 다급하게 자신을 방어하거나 도망가지도 않는다. 그것은 비언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언어적인 표현에 익숙한 해수에게는 낯선 방식이었다. 길고양이 순무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자신의 일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말에 관해서라면 그녀는 두려움을 느껴 본 적이 없다. 그녀는 말의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믿었다. 그녀는 해석하고, 설명하고, 반박하고, 동의하고, 고백하면서 보이지 않는 자신의 내면을 정확하게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그녀는 깨닫는다. 자신은 그저 넘쳐 나는 말들에 둘러싸여, 불필요한 말을 함부로 낭비하는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이 한 말이 언제 탄생하고 어떻게 살다가 어디에서 죽음을 맞이하는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경청』김혜진, 민음사, 225쪽>     


처음부터 피해자 해수의 얼굴은 반쪽짜리였다. 해수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스스로 내뱉지 못하는 나머지 반쪽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은 차츰 짙어지는 해수의 자기 고백적 독백과 보내지 못한 편지들에 녹아 있다. 뉴스의 사회면에도 가끔 등장하는 익숙한 이야기였다. 


해수 스스로 실수라고 변명했으며, 나락으로 떨어져 고립된 자신의 처지가 가혹한 것이라고 여겼던 그 사건은 부메랑처럼 돌아와 자신의 일이 되었다. 세상은 해수에게 어떤 반론권도 주지 않았지만 그것까지도 해수가 감당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해수는 그 일을 방어하지 않고 있었던 그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한순간 “말로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아니라 말로 사람을 죽이는 사람”(282쪽)이었다는 것을 담담하게 고백할 수 있게 된다. 해수는 자신을 향한 악플러들에 대한 대응을 멈추고, 자살한 배우의 아내를 만나 진심으로 사과하기도 한다. 그가 건넨 사과의 말들은 거절되지만 해수는 앞으로도 자신의 입장을 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는 드러난 것에만 집착하거나 감정의 쏠림 없이 일어난 일을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균형감을 갖추게 된 것이다.        

 

길고양이 순무를 구조하려고 동네 공터에 통덫을 설치하면서 해수는 처음으로 은행나무를 보았다. 그는 평범한 나무에서마저 잎을 피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은 모습을 발견하는 자신을 경멸했다. 순무를 기다릴수록 공터는 점점 성스러운 장소가 되어갔고 순간순간 은행나무의 푸르름에 빠져들기도 했다. 소설이 막바지에 이르러 모든 갈등과 긴장이 풀어진 듯 일순간 고요에 빠질 즈음, 해수는 공터의 은행나무가 실은 일직선으로 겹쳐진 두 그루의 나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해수가 바라보았던 푸르름의 실체가 사실은 뒤쪽에 있는 나무 때문이라는 사실도. 


하나의 사건은, 사람은, 삶은 단 한 줄의 언어로 요약될 수 없다. 집을 정리하면서 새로 시작하게 될 상담을 준비하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왔다. 드러난 것과 감춰진 것, 스스로 싸워 지켜낸 것과 타인에게 기대어 얻은 것, 언어로 표현되는 것과 침묵만이 담을 수 있는 것, 그 모든 것의 총합이 나 자신이며 인생이라는 것을 해수와 함께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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