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 Jan 05. 2024

마음의 불덩이로 재가 된 여자, 엠마

귀스타브 플로베르 소설 <마담 보바리>, 민음사

마담 보바리의 이름은 엠마다. 남편의 성을 이름으로 쓸 수밖에 없었던 '마담 보바리'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그는 갇혀있는 여자였다. 엠마는 늘 어딘가로 떠나려 하지만 목적과 방향을 잃고 끝없이 헤맨다. 그리하여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남자에서 저 남자로 떠돈다. 겉으로만 보자면 엠마는 외도를 서슴지 않고, 아이를 돌보지 않으며, 사치하다 마침내 남편마저 파산하게 만든 용서받을 수 없는 여자이다. 엠마는 자신의 죄를 순순히 고백하지 않는다. 그는 뻣뻣한 태도로 세상과 남성들을 원망하다 스스로 극약인 비소를 삼킨다. 1857년에 출간된 이 파격적인 소설로 인해 이 책의 편집자와 작가가 "공중도덕과 종교적 미풍양속을 해쳤다는 이유로 피소" 되었다고 한다. <마담 보바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는 각자의 욕망이 있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삶을 살아갔다. 엠마는 과연 죄인일까?      




엠마도 돈키호테처럼 책을 사랑한다. 엠마가 읽었던 소설은 통속적이고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들이었다. 돈키호테는 자신의 로망인 기사도를 실현하기 위해 모험을 떠날 수 있었으나 엠마는 상상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에게 결여된 것은 경험이었다. 엠마는 세상을 액자 속 그림처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변함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엠마는 권태를 느낀다. 그래서 처음에는 남편이 될 샤를을 구원자로 생각했다.      


샤를 역시 엠마를 욕망하며 갈망에 시달린다. 마침내 엠마와 결혼한 후 지난날을 반추하며 오늘을 만끽한다. 샤를은 피곤한 하루 일과를 보낸 후 엠마와 엠마가 만들어놓은 집안의 화사한 분위기 속에서 휴식을 취할 뿐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에게는 자기만의 세계가 없지만, 어쩌면 그 점 때문에 나름대로는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 소박한 하루에 만족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서 변화란 불필요한 것이다. 가정의 정상성을 확고하게 믿고 있는 샤를은 자신의 새 아내에게 남아있는 갈망을 읽지 못한다. 두 사람의 언어는 완전히 달라서 접점이라고는 찾을 수 없다. 샤를에겐 자기 언어가 없고, 엠마의 언어는 비현실적이고 몽상적이다.      


그러나 엠마의 신경증으로 인해 보바리 부부는 용빌이라는 마을로 이사를 단행한다. 그곳에서 엠마는 연인 레옹을 만나게 된다. 레옹 역시 엠마처럼 일상에 권태를 느끼며 어떤 강렬한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였다. 레옹은 엠마와 비슷한 인물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적인 성취를 이루며 엠마와는 다른 삶을 살아간다. 용빌에서 엠마를 짝사랑하는 것에 가까웠던 레옹은 재회 후 엠마의 욕망을 극대화시키는 인물이기도 하다.      


남편을 만나기 전에 레옹을 만났다면 엠마는 행복할 수 있었을까?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자유를 생각하며 딸이 아닌 아들을 낳기 원했으며, 딱 한번 초대받았던 귀족들의 파티에서 무심코 들었던 여성의 이름을 딸의 그것으로 지어주었던 엠마. 엠마의 열정과 욕망은 꽃처럼 화르륵 피었다가 금세 시들어버린다. 현실이 초라할수록 엠마는 사랑의 환상에 더욱 빠져들고, 사랑에 빠져들수록 현실의 비루함은 진해진다. 끊임없이 환상을 키워가는 엠마의 모습은 그의 제한된 삶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으로 느껴졌다. 엠마의 권태는 단지 일상이 반복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선택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갑자기 떠나버린 레옹처럼 엠마에게는 떠날 곳이 없었던 것이다.       


레옹과의 정신적인 사랑, 육체적 욕망을 깨워준 로돌프와의 밀회, 다시 재회한 레옹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엠마의 거침없는 열정. 욕망이 커질수록 엠마의 생명력도 진해진다. 엠마는 자신의 욕망에 폭풍우 속 야생 숲처럼 미친 듯이 휩쓸린다. 그의 야성은 점점 도덕과 금기에 대한 방어기제를 버리고 레옹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토록 바라던 사랑을 이루었는데 엠마는 여전히 권태롭고 불안하다.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엠마의 욕망과 불안을 이용하는 용빌의 몇몇 인물들은 엠마를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며 자신의 이득을 채워간다. 엠마의 고립은 그가 꿈꾸었던 사랑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자, 스스로 죽기로 결심한 순간이기도 하다. 엠마는 극약인 비소를 삼킨다. 엠마의 자살은 법률이나 종교와 같은 외부의 제도가 자신을 심판하는 것을 막는 효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그의 고통스러운 죽음의 과정은 마치 스스로를 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랑이라는 우상을 쫓다 파멸해 버린 엠마의 삶에 대해 도덕의 잣대만으로 비난할 수는 없었다. 엠마의 부도덕함보다 더 짙게 드러난 것은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있었던 제한된 삶이었기 때문이다. 사랑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미워지지도 않는 엠마의 모습에서 발견한 것은 결국 연민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침묵하는 말들, 기다림의 말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