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연극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템페스트>
진정 이 세상의 온갖 사물이 다 녹아서,
이제는 사라져 버린 저 환영처럼 희미한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된다.
우리는 꿈과 같은 존재이므로 우리의 자잘한 인생은 잠으로 둘러싸여 있다.
<템페스트 4막 1장, 푸로스퍼로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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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신화가 되어버린 이름, 윌리엄 셰익스피어. 그의 작품 중 희극으로 분류되는 <베니스의 상인>과 <템페스트>를 읽었다. 셰익스피어가 활동했을 당시 야외극장에서 관객들은 몇 시간을 서서 그의 연극을 관람했다고 한다. 셰익스피어의 대본은 이야기의 원형에 가까우며, 캐릭터들 또한 인간 욕망의 바닥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야기의 구조가 탄탄하며, 개성 있는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끌고 나아간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의 주요 대본에서는 복수심에 사로잡힌 캐릭터가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햄릿>에서는 햄릿이, <베니스의 상인>에서는 샤일록이, <템페스트>에서는 푸로스퍼로가 그러한 역할을 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하는 존재이기에 드라마에서 복수는 공감을 불러일으킬만한 친숙한 소재이며, 현대의 소설,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여전히 수없이 반복되고 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복수 자체가 관객 혹은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줄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의 극 안에서 성공하는 복수는 거의 없다. 복수를 시도하다 주인공 포함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죽어버리거나 (햄릿), 자신이 만든 트릭에 갇혀 복수에 실패하거나 (샤일록), 결정적인 순간 복수를 포기하여 자신과 타자들을 다소 갑작스럽게 해방시켜 버리는 (프로스퍼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복수는 등장인물의 감정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며 그의 폭발하는 욕망에 관객을 끌어들인다. 그래서인지 셰익스피어의 대본에서는 다소 친숙한 '막장끼'가 느껴진다. 복수는 도파민이 폭발하는 고자극 소재임에는 분명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사회적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어떤 공공선을 가지고 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복수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관객은 탄식할 수 있을 뿐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는 어렵다.
그래서인지 용서를 통한 자유와 해방을 언급한 <템페스트>의 이야기는 꽤 인상적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그러하듯 셰익스피어는 <템페스트>에서도 '복수'의 반대편에 '사랑'을 배치해 놓는다. 물론 복수심에 사로잡힌 인물 푸로스퍼로의 딸 미랜더와 나폴리 왕자 퍼디넌드를 결혼시키려는 계획은 그 순수성을 의심해 볼 만하다. 푸로스퍼로의 빼앗긴 왕위에 대한 보상심리로 자신의 딸을 이용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결말에 이르렀을 때 미랜더와 퍼디넌드의 결합은 분명 복수심을 무너뜨리고 화해를 재촉하는 기폭제의 역할을 한다. 비록 결말이 급격하게 전환되어 아쉬운 지점은 있지만, 그럼에도 이야기 구조의 균형이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셰익스피어의 재간이 돋보인다.
프로스퍼로의 대사처럼 '우리가 꿈과 같은 존재'이며 '우리의 자잘한 인생이 잠으로 둘러싸여' 있다면 욕망과 복수는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1막부터 사랑이 등장하고, 4막에서 인생의 무의미함을 말하고 있다면 푸로스퍼로의 복수는 그만 몰랐을 뿐 애초에 글러먹었던 계획이었을지 모른다. 극의 재미를 위해서라면 뭔들 못할까. 등장인물과 관객을 속이는 일은 셰익스피어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갑자기 무대 뒤에서 혼자 후후 웃고 있었을 셰익스피어의 얼굴이 그려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