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죽일 놈의, 사랑
J. M.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쿳시의 장편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제국주의의 폭력성에 대해 인식은 하고 있지만 회피적인 태도를 취하는 치안판사 '나'와 한 '야만인' 소녀를 향한 그의 사랑을 얼개로 당시 세계가 안고 있는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이다.
아름답고 힘 있는 문장 때문인지 읽는 내내 힘들면서도 만족스러운 독서를 할 수 있었는데, 내가 주목해서 봤던 장면은 치안판사의 사랑과 그로 인한 변화였다.
치안판사의 사랑은 가슴 절절한 나름의 진심을 담고 있지만, 치명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의 사랑 자체가 품고 있는 폭력성이었는데, 이에 대해 정작 치안판사 자신은 무지했던 것이다.
치안판사의 사랑은 나름 헌신적이다. '야만인'에서 '죄수'가 된 비참한 처지의 원주민 소녀를 그는 자신의 숙소로 데리고 온다. 소녀는 고문으로 인해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 그는 매일 저녁 소녀의 몸을 씻기고, 기름을 발라준다. 기묘하게 관능적인 이 장면들은 그의 회피적인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마치 죄를 씻기는 정결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가 씻기는 죄는 누구의 죄인 것일까. 얼핏 보았을 때 소녀를 향해 '너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말을 건네는 듯한 행위는 방관자적인 자신의 죄를 씻기는 행위처럼도 보인다. 이처럼 원주민 소녀를 향한 치안판사의 사랑은 남성중심적인 순정과 낭만이 짙게 묻어있다.
반응하지 않음으로 수동적으로 거절하는 소녀 대신 직업적으로 성을 파는 여성을 찾아간다든가 하는 행위도 비슷한 맥락으로 읽힌다. 그는 소녀와의 관계에서 줄곧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내 옆에 있는 이 여자가 내 인생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그녀의 불완전한 몸을 통해 다가갔던 이상한 황홀경을 생각하면 메마른 혐오감이 차오른다. (80쪽)"
그의 사랑이 여기에서 그쳤더라면 나는 그에게 틀림없이 역겨움을 느꼈을 것이다. 다행히 그가 성찰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는 것은 그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과 소녀와의 불완전한 관계 속에서 결국 제국주의의 그것과 한치도 다름없는 폭력성을 발견하고야 만다. 그는 소녀를 원주민 부족에게 인도함으로써 독자에게 자기 사랑의 진정성을 증명한다. 이별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사랑했던 한 소녀를 이해하고자 했던 그의 무지를 어찌 미워만 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떠나고 있고, 거의 떠났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쳐다보고, 내 마음의 움직임을 들여다보며, 그녀가 누구인지 이해해 보려고 마지막으로 노력한다. (중략)
나는 이 아침 이 황량한 언덕 위에서, 밤이면 밤마다 나를 그녀의 몸으로 이끌어 마비 상태로 몰고 갔던 욕망의 흔적을 스스로에게서 찾아낼 수 없다. 아니, 여행을 하면서 느꼈던 동료애의 흔적마저 찾아낼 수 없다. 공허함만 있을 뿐이다. 이토록 공허해야 하는 황량함만 있을 뿐이다. 내가 그녀의 손을 꽉 쥐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나는 눈에 보이는 대로 너무나 분명하게 볼 따름이다. 입은 크고, 앞머리는 눈썹 위에서 가지런히 잘려 있고, 내 어깨너머로 눈길을 둬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땅딸막한 여자, 이방인, 낯선 곳에서 왔다가 행복하지 못한 방문을 끝내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손님. 내가 말한다. "안녕." 그녀가 말한다. "안녕." (중략)
헤어진 지 며칠 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녀의 얼굴이 벌써 내 기억 속에서 굳어지고 불투명해진다. 마치 그 위에 껍질이 씌워진 듯 말이다. 나는 소금 지대를 터벅터벅 걸으며, 내가 그처럼 먼 곳에서 온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게 놀랍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내가 원하는 건 낯익은 곳에서 편안하게 살다가 내 침대에서 죽어, 옛 친구들의 조문을 받으며 무덤으로 가는 것뿐이리라. (121-126쪽)"
사랑했던 사람과 작별하면서 심리적인 죽음을 맞이한 한 남자의 공허. 나는 이 남자의 무지한 순정에 별 수 없이 설득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