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자화상
폭음, 거식증, 이상행동...... 마음의 병은 젊은 예술가의 내면을 붕괴시켰다. 분단 후 일본으로 간 아내와 두 아들로부터 남겨지고, 대구 전시의 실패로 화가로서 커리어도 막혔을 때 그의 상실감을 짐작하기란 어려운 종류의 것이 아니다. 거울을 보며 그린 자화상이니 정확하게 묘사되었을 법. 하지만 어딘가 비뚤어진 좌우대칭과 초점 없는 흐릿한 눈, 강한 필압의 입술은 의욕의 상실, 욕구의 실패, 정서의 감퇴 등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이건 사람이 의식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화가 이중섭은 죽음 1년 전 1955년, 정신병원에 가라는 주변에게 자신이 멀쩡하다고 보여주려고 자화상을 그렸다.
이중섭은 삶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식민 조국을 살아냈고, 해방 조국을 몸소 부딪혀야 했다. 일본으로 미술을 공부하러 유학 갈 정도로 풍족했지만, 화가로 살면서 험한 생활고를 견뎌야 했다. 그의 지지대였던 가족은 1952년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으나, 이중섭은 한일국교가 단절되었고, 한국전쟁이 진행되던 중이라 함께하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산학교 시절 후배가 이중섭의 아내에게 접근해 사기를 쳐 거액의 빚을 떠안게 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이중섭의 그림은 순결하다. 그는 이해받기 어려운 아픔을 감각화하는데 몰두했다. 어두운 시기를 보내던 이중섭을 지탱했던 건 그럼에도 가족이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그의 주요 모티프가 되어, 색으로, 그림으로 승화되었다. 그의 담뱃갑의 은박지나 엽서 등에 그려진 그림은 추상성과 구체성을 오가는 묘한 애상을 자아낸다. 이중섭, 이제 그는 국민화가로, 민족의 화가로 추앙받지만 생전의 그는 단지 아내 마사코와 두 아들(처남, 삼남)을 깊이 보고 싶어 했다. 1953년, 친구 구상의 도움으로 단기 체류로 일본을 간 이중섭은 일주일 간 여관에서 가족과 재회한다. 결국 이것이 가족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이중섭은 1956년 39세의 나이로 망우리공원묘지에 묻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