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단하기] 윤동주

<자화상>

by An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 지려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었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발문, 강처중)


한 사내가 있다. 구부러진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에 있는 '외딴' 우물을 찾아간다. 사내에게 산기슭의 귀퉁이를 위태롭게 건너는 일은 일이 아니며, 다만 무정하게 세상에 홀로 던져진 우물을 찾아갈 뿐인데, 이는 차갑고 처연하다. 우물은 논의 가장자리, 논가에 위치해 주변의 풍경을 담고 있다. 달이 밝아지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다는 병치 구조에 '이'라는 주격 조사는 인과를 벗어나 각 시어의 사실성을 회복하며, 동시에 고립된다. '우물'은 보조사 '는'이 개입되어 동주의 내면세계가 드리워진다는 장치라는 암시가 있는 한편, 그 뒤에 나오는 달, 구름, 하늘, 파란 하늘, 가을은 물리적 사실로서 객관적으로 진술되어 있다. 그의 행위는 어쩔 수 없이 종속된 1인칭의 세계에서 무서우리만큼 삼인칭의 서술을 통해 자연 속의 자아를 끊임없이 밀어낸다.


그러나 그는 다시 사내를 되찾으러 간다. 사내는 우물 속에서 사내를 발견하고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간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진다. '도로 가 들여가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다. 사나이는 계속해서 정서와 사실 가운데서 진동한다. 그건 시인 윤동주의 떨림이다. 자기를 자기 아닌 것으로 다른 것으로 만들어 절대적 비인칭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길을 내다보았지만, 끝내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라고 회귀하며 언술은 흔들린다. 그의 자의식은 언제나 그렇게 위태로웠다. 시인의 문법은 저 자연을 기술하는 것만큼 무의지적이지 않다. 반복되는 한 사내의 행위는 사물과 나의 관계, 나와 시의 관계, 그리고 시대와 나의 관계를 나타내지만, 그건 자신의 깊이며 당신의 섬세함이라는 표현에 가깝다. 그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해소하지 않는다. 다만 미워졌다 그리워지며 자신과 내기를 한다. <자화상>(1939)에서 내기의 몫이 무엇이었는지 해소되진 않지만, 그는 결국 지치지 않고 끝끝내 시를 쓰고 썼다. 그가 스물 일곱에 죽고 3년 뒤 1948년, 112여 편의 유고 시집 초판본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시대의 자화상을 부끄러워하는 몫은 언제나 시인의 몫이었을까. 이념이 반대된다는 이유로 정지용 서문과 친우 강처중 발문은 1955년 정음사 유고 보충본에서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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