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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미니 Feb 05. 2024

이혼일기(49)

승자


한달의 간격을 두고 이루어지는 두번의 가사조사 사이에 파파데이가 있었다.

 아이의 어린이집은 검찰청에 있어서 검찰청주차장에 차를 대면 된다. 어린이집에 남편의 차번호를 등록하고 그 다음은 니가 알아서 하라고 했다. 혼자 네비보고 운전하는것, 게다가 초행길은 더 못해서 늘 옆에서 말해주어야 하는 사람인데 이제 내 알바가 아니다.

 서류상 마누라지만.. 그 덕에 검찰청에 차라도 대보니 기분이 어때?
 
늘 검사가 되고 싶다고 했던 그에게 비아냥 거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나도 참 유치하기 짝이 없다.

 야망은 있는데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다.. 라는 내용의 짧은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러면 부러움이 생겨 이내 시기 질투로 변하고, 그런 사람은 좋은 부모와 배우자가 될 수 없다.


능력이 없으면 노력이라도 해야하고,
노력하지 않을거면 겸손이라도 해야한다


정말, 맞는 말이다.


 처음 만나기 시작했던 2013년도, 38살이던 그는 매해 30만원을 들여 로스쿨 입시시험을 봤다. 로스쿨을 들어가는 것 자체가..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서 저렇게 매년 떨어질 줄 몰랐다.

 근데, 조금 그를 알고보니 그건 너무 당연한 결과였다. 10문제를 못 풀고 나왔다는 그는 매해 3번으로 찍었으면 점수가 좀 더 나왔을 텐데!! 하고 분노했고, 또 돈지랄같은 원서를 접수하고 면접기회가 주어지면, 본인은 면접 분위기를 리드하는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칭송했다.

1) 아니.. 40문제의 4분의 1을 시간 내에 못 푸는 시험을 계속 본다는 것 자체가 의문이었고,
2) 교수님들이 그냥 넘어간 것은 니가 넘나 말을 잘해서가 아니라 얜 더 말할 필요가 없구나 라는 생각일거야.. 라는 내 생각은 돌려돌려 말해봐도 전혀 알아먹지 못하고 도리어 화를 내는 그를 바라보며,

결혼하고 그와 어머니가 변호사가 되어 구의원을 하고 어쩌고 하는 인생계획을 듣고, 와 저런 기상천외한 사람들이 지구상에 있구나.. 당황했지만

 그래도, 어차피 세상에 그놈이 그놈이니 그냥 나를 좋아만 해주면 된다. 라고 생각했었다.

인정해야한다.

내가 틀렸다.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났다. 일상을 지탱하는 것은 책임감과 성실함이고, 그것이 없는 존재와는 공존이 어렵다.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

 정신없이 일을하다보니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할만큼 했으니 혹여 그가 늦거나 안와도 아이에게 미안해할 일은 아니라고 마음을 가다듬고 퇴근무렵 전화기를 보니 다행히도

 다 끝나고 지금 관사 앞 놀이터야.. 새우깡을 사달래서 사줬는데... 친구도 나눠주고 그러는데.. 이거 이렇게 먹어도 되는 건지...

 왜 저렇게 마침표는 남발을 하는 거지. 별 게 다 화가 난다.

- 20분쯤 갈거야. 일단 먹었는 데 그냥 둬.

 그래도 아이 아빠라고, 친정부모님께 맡겼을 때와는 좀 다른 쪽으로 안심이 된다. 적어도 아기는 의기양양할 것이다. 하비함미보다  아빠와 함께 있는 아기들의 어깨는 더 펴져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참 좋은 거야. 라고 생각하며 놀고 있다는 관사 앞 놀이터로 갔다.  

단지에 들어서 놀이터가 보이기 시작하면 본능적으로 눈이 아이를 찾는다. 멀리서 놀고 있는 아이와 그 옆에 있는 그가 보인다. 빨뻘거리며 돌아다니는 여자아기와 다섯발자국 정도 뒤에 서있는 짧고 두툼한 덩치의 남자. 저기 있네.

 마음 속에서는 죽이고 싶게 미운 감정의 대상이라도, 생활의 순간에서는 그에 앞서 다른 느낌이 나타난다.  이건 긍정적인 반가움. 이 아니라 그저 아 찾았다! 하는 뇌의 반응일테지만 그마저도 혼란스럽다. 재빨리 앞선 반응을 뒤로 끌어당기고, 미움을 앞으로 내민 후 전투태세로 돌입한다.

전투태세는, 무시하는 것. 냉정하게 구는 것. 바늘하나 들어갈 틈을 보이지 않는 것. 

- 아가 엄마 왔어!
이제 아빠 안녕히 가세요 토요일날 또  만나요 출장 잘 다녀오세요. 아빠 사랑해요. 해야지?

 새우깡 봉지를 들고 친구들과 노는 데 정신이 팔린 아이는 또 순순히 멈춰서 손을 흔들며,

아빠 안녕! 하고 달려가 버렸다.

 이제 으레히 아빠는 없겠거니.. 하는 걸까. 뭐라도 상관없다. 어쨌든 겪어야 하는 현실이니, 잘 해결해 가면 된다.

 단지를 빠져나가는 그의 어깨가 축 쳐져 있어도 하나도 불쌍하지 않다.

 매일 집에만 있다고, 성격장애라던 니 아내가 이렇게 멀쩡히 살고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어때? 나보고 너네 어머니 없음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잖아. 이제 어떻게 생각해? 

 내가, 이겼다. 니가 뭐라고 어떻게 생각하고 내뱉었든지 간에, 나 이렇게 잘 살고 있어.  우리 아기와 이렇게 멋지고 즐겁게 잘 살고 있어.

이것만으로도 내가 이긴거야.
.
.
.

가사조사란,
조사관이 이혼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세부질문을 하고 보고서를 적어내면 판사는 그것을 판결에 참고하는 것이다.  그러니 조사관의 마음을 움직여서 나에게 유리한 보고서가 쓰여야 하고, 그러려면 그 때의 감정으로 돌아가 진술을 해야한다.

 하지만, 이미 그가 없는 편안하고 바쁜 일상을 보낸 지 오래라 그게 쉽지 않았다. 낯선 사람 앞에서 굳이 꺼내기 싫었던 기억들을 억지로 풀고 있는 자체가 참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더라도, 두번째이니 익숙하게 법원에 들어서 조사실 앞 대기실에 앉았다. 시간이 다 되어가는 데 그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오늘도 안오나..? 아님 매번 그렇듯이 그저 늦는 것인가..?

난, 뭘 원하고 있지..? 안오길 바라나..아니면 그래도 마주하고 앉아 그 꼴 보고 속시원히 말해보고 싶은 걸까.. 그 조차도 지금은 알 수가 없다.


깜빡 깜빡,  재촉하고 종용하듯 위태로운 시간이 가고 있는데 머리가 텅 텅

비어버렸다.  

--------

제가 몇번 지역맘카페에 남편이 시험 준비중이라는 고민글을 남긴 적이 있ㅇ어요.

* 남편 시험 끝난 다음 주 제 일을 시작해야하는데 본인    쉬어야 하니 아기를 볼 수가 없다고 안된대요..

 * 주말에 일이 있다고 하더니 저 몰래 또 로스쿨 입시시험을 보러 갔요.  

 가장임에도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프레임이라, 많은 분들이 응원한다던가.. 남편을 이해한다던가.. 하는 댓글들 남겨주셨었는데,

 이런 내막이 있었습니다 ;-)

나이 40넘어 백수임에도,

그는 항상 "법조인가족"이 되고 싶다고 했어요. 저는 그 말이 너무너무 싫었습니다. 그저 큰 노력없이도 이미 그런 상황인 친구들이 꽤 많았거든요. 꼭 부유한 친구들이 20대부터 당연히 가지고 있는 명품백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다는 느낌이었어요.


입춘이 지나고, 비가 내립니다.


이제 정말로,


봄이 오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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