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파적 사회에서 언론에 대한 접근법
언론에 대해 사람들의 생각은 많이 엇갈린다. 언론에 대한 정파적, 진영적 태도가 강한 사회 분위기 영향이 크다. 보도의 내용에 따라 동일한 언론사에 대한 판단이 완전히 뒤바뀌기도 한다. 언론에 대한 평가가 SNS 등을 통해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치는 몇몇 유명 인사들의 주장에 따라 춤을 추는 모습을 수시로 볼 수 있다. 심지어 학자들 사이에서도 좋은 언론에 대한 판단이 크게 엇갈리는 일이 많다.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언론’이 아니라 ‘어떤 편을 드는 언론’이 좋은 언론이라거나 나쁜 언론이라는 식의 주장을 공공연하게 하는 언론인을 쉽게 볼 수 있다. ‘어떤 언론’은 언론이 지켜야 할 원칙이나 추구해야 할 가치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것이고, ‘어떤 편을 드는 언론’은 실제로 특정 보도가 어떤 진영에 유리한 것인지를 놓고 언론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이다. 원칙에 대한 논의보다는 보도의 유불리를 중심으로 한 논의가 앞서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언론이 본질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원칙적인 생각을 해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무척 재미가 없겠지만 미국의 한 헌법학자가 언론의 자유가 세상에 무슨 도움을 주는 것인지를 네 가지로 정리한 것을 소개한다. 필자가 언론법제나 언론윤리 강의를 할 때마다 빠뜨리지 않는 내용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언론 자유’의 기능
개인의 자아 실현 (indivisual self-fulfillment)
지식 발전과 진실의 발견 (advancing knowledge and discovering truth)
모든 사회 구성원의 의사 결정 과정 참여 (participation in decision making by alll members of society)
사회의 안정과 변화 사이의 균형 (achieving more adaptable and more stable community)
T. I. Emerson(1970), The System of Freedom of Expression, New York: Random House, 6~7쪽.
첫 번째 기능은 사회적으로 말과 같은 표현 행위를 함으로써 각 개인이 자아를 실현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누군가 아무런 표현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가 존재한다는 것을 잘 인식하기도 어렵다. 예술적 표현도 이런 자아 실현의 한 갈래가 될 것이다. 두 번째 기능은 학문적 발전이나 연구에 관한 것이다. 천동설을 주장하는 교회 권력에 맞서서 지동설이 옳다고 주장하고도 온전할 수 있어야 학문이 발전하고 사회가 진보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사회적인 의사 결정 과정에 구성원들이 참여하기 위해서는 공적 정보의 제공, 공적 사안에 대한 토론이 자유롭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구성원들의 여론이나 투표를 통해 사회적 결정이 내려지는데, 이를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모든 공적 쟁점에 관해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내용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찬반 의사표시를 하게 만드는 것은 구성원들을 바보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사회의 다양한 생각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고 표출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수의 생각, 특이한 생각이라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사회가 안정될 수 있고 장기적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 네 가지 역할론은 언론자유가 사회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한 고전적 이론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 중에서 일반적인 언론의 역할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세 번째, 사회적인 공적 논의를 보장하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공적 논의를 위한 언론 활동은 ‘절대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연방대법원에서도 정설로 통한다. 물론 우리 헌법재판소도 원칙적으로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만큼 사회적인 공적 관심사에 대한 언론 보도는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이 이런 공적 관심사를 제대로 다룬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구성원들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도록 다양한 권력에 대한 감시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오로지 구성원 모두의 이익, 즉 공익을 중심에 놓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권력이 남용되거나 잘못 행사되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선한 권력’과 ‘악한 권력’으로 나누고 선한 권력에 대해서는 언론이 권력을 감시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아가 언론 자체도 권력이기 때문에 오히려 언론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는 주장도 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종종 특정 정치 권력을 옹호하는 쪽에서 제기된다.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을 향해 역공을 하는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언론 또한 사회적으로 권력인 측면이 분명히 있으므로 감시가 필요하고 실제로 여러 가지 장치들이 있다. 그런데 언론의 권력 감시 기능을 견제하기 위해 이런 주장이 동원되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끊임없이 시도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불리한 보도를 ‘가짜 뉴스’ 운운하며 공격하는 모습이 지금도 많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의 권력 감시 기능이 반대 진영을 향해서만 작동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 대표적이다. 한쪽 진영에 대해서만 권력 감시 기능이 작동하는 언론은 반쪽만 언론이다. 특정 진영이 집권했을 때만 날카로운 권력 감시 보도를 쏟아내는 언론을 두고 ‘권력 감시’라는 언론의 본질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이런 언론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언론 품질 문제도 중요하다는 점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언론이 충실하게 사실에 입각해서 보도하고 또 오로지 공익성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하더라도 제대로 교열도 보지 않고 맞춤법조차 지키지 못하면서 제대로 권력 감시나 필수적인 정보 전달을 제대로 수행할 수는 없다.
최근 인터넷 언론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품질이 낮은 언론의 문제도 심각하다. 특히 전통 언론들도 디지털 콘텐츠 생산에 매달리고, 인력 투입을 점차 줄이면서 기사의 정밀함이 많이 떨어지고 있다. 온라인 기사, 유튜브를 비롯한 SNS에 올리는 콘텐츠에서 거친 표현을 함부로 사용하거나 단정적인 주장을 그대로 옮기는 경우도 많다. 중앙일간지의 논설위원이 베이징 동계올림픽 과정에서 쇼트트랙 판정에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그냥 중국이 메달 모두 가져가라고 하자”라는 말을 제목에서부터 기사 본문까지 모조리 도배한 글을 온라인 기사로 올렸던 일은 매우 상징적이다. 어쩌면 그 논설위원은 처음에는 매우 신선한 시도를 했다고 스스로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주요 언론사 기자들 사이에서조차 기사의 공공적인 성격에 대한 인식이 크게 허물어진 단면을 볼 수 있었다.
점점 교열은커녕 데스킹도 없는 기사들이 늘어나면서 이런 식의 정제되지 못한 콘텐츠가 시청자와 독자에게 곧바로 전달될 위험도 커지고 있다. 언론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윤리 문제 이전에 기본적인 품질 수준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상황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