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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윤리의 첫 번째 기둥: 사실성

언론윤리를 구성하는 세 개의 기둥에 대해

 유튜브 채널인 가로세로연구소는 2020년 8월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법무부 장관에 지명된 뒤 “조 전 수석이 사모펀드를 운영했고, 그 사모펀드에 어마어마한 중국 공산당 자금이 들어왔다”거나, “조 전 수석의 딸이 빨간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 “조 전 수석이 여배우를 지원했고,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 대동했다”는 등의 주장을 했다. 가로세로연구소 측은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할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도 않았고, 이런 주장은 모두 허위로 판단됐다.


 조국 전 장관이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법원은 이들에게 조 전 장관 측에 5천만 원을 배상하고 허위사실이 포함된 유튜브 동영상은 삭제하라고 명령했다. 이들은 유튜브 방송 때는 물론 재판 과정에서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자료는 제시하지 못했다.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사실상 언론 매체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곳에서 이런 식으로 확인되지 않은 주장을 내보냈다가 논란을 일으키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어느 쪽이든 열광적인 지지자들의 입맛에 맞는 주장을 내보내는 것이 우선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편향적인 매체가 아니라도, 디지털 미디어 기술이 보편화된 지금 이론적으로 누구든 언론인이 될 수 있는 셈이다. 언론인을 내용이 무엇이 됐든 ‘콘텐츠 생산자’로만 규정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언론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려면 적어도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확인되지 않은 주장을 함부로 퍼뜨리거나, 혹은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일방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언론 활동이 아니다.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주장은 사실을 누군가에게 새로운 정보를 줄 수도 없고, 오히려 사회적인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사실성은 인류학자들이 남태평양 섬나라에 남아 있는 원시 사회의 정보 유통 과정에서도 발견한 뉴스 전달 시스템의 가장 기초가 되는 조건이다. 


 최근 들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은 없다거나,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진실이 있다는 등의 궤변을 동원해 엄격한 사실성의 원칙을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시도는 주로 사실에 입각해서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하기 마련이다. 이들은 자신이나 혹은 지지하는 세력에게 불리한 뉴스를 ‘가짜뉴스’라고 비난하며 부정하기도 한다. ‘탈진실’이나 ‘포스트 트루스’(post truth), ‘대안적 사실’(alternative truth) 같은 그럴듯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려는 사람도 있다. ‘탈’진실이나 대안적 사실이라면 이미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대놓고 사실을 무시하겠다는 주장이나 마찬가지다.


 2022년 대선 과정에서 어느 쪽을 지지하든 유튜브를 통해 대놓고 일방적이고 근거 없는 주장을 그럴듯하게 퍼뜨리는 채널들이 많았다. 서로 공격하던 대표적인 두 채널 관계자들은 나중에는 합동으로 행사를 여는 등 이합집산이 벌어지기도 했다. 특정 채널이 어떻게 변신을 하든, 앞으로 이런 형태의 비즈니스 모델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실과 무관하게 자극적인 주장을 해서 관심을 끄는 데만 성공하면 상당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사업 기반은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입맛에 딱 맞는 자극적인 주장을 펼치는 채널을 열심히 구독하고 응원해주는 소비자들이다.


 만약 우리 사회가 정상적인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합리적인 방식으로 굴러가기를 바란다면 적어도 사실성의 원칙을 엄격히 준수하려고 노력하는 경우에만 언론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소비자들부터 자기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라도 사실이라면 존중해야 한다. 대법원 판결이 나와도 절대로 인정하지 않고 엉터리 주장을 하는 채널을 클릭하지 않아야 한다.  자기편은 무슨 짓을 해도 정의롭고, 상대편은 뭘 해도 매국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인 사회가 합리적으로 운영될 수는 없다. 그 피해는 우리 모두, 그리고 미래 세대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다만 사람은 한계가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실수할 수 있고, 정보 통제로 핵심에 접근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사실성’은 결과적으로 항상 미흡할 수밖에 없다. 사실성 원칙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언론 보도가 저지른 실수를 파고든다. 나중에 미국의 4대 대통령이 된 제임스 매디슨이 1800년에 말했듯이 언론 자유는 일정 정도 남용이 불가피하다. 남용까지 가지 않더라도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면 다소 오보를 하더라도 법원이 언론에 책임을 묻지 않는 이유다.


 사람이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언론의 오보에 지나친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과 함께 언론인들도 자신이 취재한 내용을 너무 쉽게 확신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일깨운다. SNS에 온갖 주장을 올리거나 누군가의 글을 퍼 나르는 일반인들도 마찬가지다. 언론윤리의 가장 기본이 되는 기둥은 바로 ‘사실성’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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