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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신뢰도와 언론윤리가 사회적 관심사가 된 이유

언론윤리 원칙과는 거리가 먼 언론윤리 논쟁

 몇 년째 세계 꼴찌라는 언론 신뢰도 조사 결과


 한국 언론의 신뢰도가 전세계에서 몇 년째 꼴찌라는 식의 보도가 이어진 적이 있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주관하는 조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 조사는 2012년 영국을 포함한 5개국을 대상으로 시작됐는데, 한국은 2016년부터 한국언론진흥재단이 파트너로 참여하면서 조사에 포함됐다. 


 일부 국가에서 특정 주제에 관한 면접 조사를 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조사는 온라인으로 이뤄진다. 연구소 측은 온라인으로 뉴스를 소비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조사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처음 보고서를 낼 때부터 강조하고 있다. 특히 디지털 환경에서의 뉴스 소비에 관한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시작된 조사인데, 한국에서는 이 조사가 언론 신뢰도에 관한 순위를 매기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조사에서 국내에서 가장 관심을 모은 부분이 바로 언론 신뢰도에 관한 것이다. 뉴스 전반을 고려했을 때 ‘대부분의 뉴스를 거의 항상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주고 ‘전혀 그렇지 않다’면 1점, ‘매우 그렇다’면 5점을 주는 방식의 5점 척도 조사다. 이 조사 결과는 어떤 부분을 뽑아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비칠 수 있다. 


 처음 조사에 포함된 2016년의 결과만 놓고 보아도 그렇다. 먼저 4점과 5점을 준 응답자를 뉴스를 ‘신뢰한다’고 답한 사람으로 보고 그것을 조사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다음으로 1점과 2점을 준 응답자를 뉴스를 ‘불신한다’고 답한 사람으로 보고 그것을 결과로 제시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각자 부여한 점수의 평균값을 토대로 1(매우 불신)점에서 5점(매우 신뢰) 사이에 어느 정도에 해당하는지를 보여줄 수도 있다. 


 첫 해의 조사는 ‘신뢰한다’의 합이 22%였다. 그리스의 20%에 이어 조사 대상 중에서 두 번째로 낮았다. 5점을 기준으로 한 평균 점수는 2.89로 그리스와 미국, 프랑스에 이어 네 번째로 낮았다. 그런데 특이한 부분이 있다. 한국의 조사에서 ‘보통이다’(3점)를 선택한 비율은 무려 47%였다. ‘불신한다’를 선택한 비율도 그렇게 높지 않다는 말이다. 적극적으로 신뢰한다는 응답을 앞세울 경우 한국의 언론 신뢰도 조사 결과는 매우 절망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 답변의 평균값을 중심으로 보면 좀 나아지고, ‘불신한다’를 선택한 응답을 제외하고 ‘신뢰한다’와 ‘보통이다’를 합치면 매우 준수한 결과가 된다.


 잘 믿기지 않을 수도 있겠다. 특히 항상 ‘한국 언론의 신뢰도는 몇 년째 세계 꼴찌’라는 기사를 접했던 사람들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신뢰도 꼴찌’라고 보도된 2020년 봄의 조사 결과를 보자. 그해 조사에서 한국은 ‘신뢰한다’는 응답자 비율이 21%로 전체 40개 조사대상국 중에서 꼴찌였다. 2017년부터 4년 연속 같은 위치였다. 그런데 그 해에 한국 언론에 대해 ‘신뢰도 불신도 하지 않는다’는 답은 45%나 됐다.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34%였다. 불신한다는 비율이 한국보다 높은 나라는 프랑스(41%), 미국(46%), 아르헨티나(40%) 등 11개였고 똑같이 34%를 기록한 나라가 2곳이 더 있다. ‘신뢰한다’를 기준으로 하면 40개국 중에서 꼴찌가 맞지만 ‘불신한다’는 응답을 기준으로 보면 40개국 중에서 공동 26위다. 5점 만점으로 응답의 평균을 낸 값은 2.80점으로 뒤에서 네 번째였다.     


언론 공격에만 동원되는 언론 신뢰도 조사 


 실제로 당시 언론진흥재단 보고서에는 이런 단일 문항의 조사결과가 그렇게 정확하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점, 그리고 ‘신뢰한다’는 응답만을 기준으로 순위를 매기는 방식이 이 조사 결과를 보여주는 가장 정확한 방법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점을 언급한 언론학 교수의 논평이 함께 실렸다(이나연, 2020).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도 관심도 없었다. 그저 “한국 언론 신뢰도 4년째 전세계 꼴찌”라는 자극적 제목으로만 소비됐을 뿐이다. 대부분의 언론학자나 언론인들, 언론 관련 시민단체 관계자들의 행태가 비슷했다. 


 이들은 이런 언론의 신뢰도 문제에서까지 엄밀한 분석과 평가보다는 자극적인 제목이 필요했던 것은 이런 언론 관계자들만이 아니었다. 한국 언론이 세계적으로 신뢰가 낮은 이유는 언론이 함부로 인권을 침해하는 엉터리 보도를 하면서도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논리가 정치권을 중심으로 확산됐고, 이는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하는 등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됐다. 당시 언론중재법을 고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민주당의 주장에 동의하는 학자나 민언련 등 시민단체 관계자 등은 모두 한국 언론의 신뢰도가 몇 년째 전세계 꼴찌라며 한국 언론은 규제를 강화해도 할 말이 없다는 식의 주장을 펼쳤다. 비판적인 언론에 대한 공격적 태도를 갖고 있는 네티즌들은 “조사를 100년 동안 했다면 100년째 꼴찌겠죠?”라는 식으로 조롱하는 댓글을 달았다.


 언론 신뢰도 조사 결과가 이렇게 소비되는 것은 조사를 한 로이터 저널리즘연구소로서도 당혹스러웠을 수 있다. 자신들의 조사가 신뢰도가 낮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이 연구소는 한국에서 ‘언론을 신뢰한다’는 답이 유독 낮게 나오는 이유를 한국의 정파적 언론 소비에서 찾았다. 이 부분은 한국 언론의 정파성 문제를 다룰 때 따로 자세하게 언급하기로 한다. 기억할 것은 지금까지 한국 언론 신뢰도에 대해 일부 언론이나 시민단체, 정치권에서 하던 주장과는 달리 한국 언론 신뢰도가 특별히 전세계적으로 바닥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언론을 신뢰한다’는 대답이 낮게 나온 것은 맞다. 하지만 응답의 전체 구성을 보지 않고 답변의 한 측면만을 부각하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사실왜곡에 가깝다. 문제는 이런 식의 언론에 대한 공격이 사회적으로 비교적 잘 통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 언론의 윤리적 수준이 매우 낮다는 인식도 깔려 있다. 언론을 통칭해서 ‘기레기’라고 공격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런 공격에는 언론이 누군가를 비판적으로 보도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치적 목적과 관련이 있다.      


언론윤리는 누구 편을 들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윤리를 앞세운 이런 공격은 의외로 효과가 있다. 너무나 터무니없는 오보를 비롯해 언론의 잘못이 일부 원인을 제공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언론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언론윤리를 이유로 한 언론에 대한 공격이 사안에 따라 다르게 작동하는, 고무줄 잣대여서는 안 된다. 한국에서 언론에 대한 정파적 소비가 비판적 소비로 인식되는 경향은 이런 문제를 심각한 수준으로 만든다. 자기편을 들어주는 언론은 말도 안 되는 보도를 해도 용감한 보도로 인식하고 반대편으로 인식되는 언론 보도는 사소한 기술적 오보만 해도 왜곡 보도를 하는 비윤리적 언론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이런 언론에 대한 정파적 소비는 종래에는 모든 언론에 ‘당신은 누구 편이냐’를 밝히라고 요구하는 수준으로 심각해졌다. 언론사들은 민감한 쟁점을 다룰 때마다 조직력 있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소비자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를 걱정하게 되었다. 언론 신뢰도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이 기자 집단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실제로 언론윤리는 비판적인 언론 보도에 대한 효율적인 방어 수단이 되기도 한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각종 의혹이 봇물 터진 듯 보도되던 시점부터 언론 보도에 대해서 제기됐던 몇 가지 윤리적 문제 제기가 있다. 몇 가지만 기억해보면 검찰 수사 상황에 대한 보도에 대해서는 ‘검찰 받아쓰기 보도’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 앞에 모인 조국 전 장관 지지자들은 검찰의 수사와 이를 보도하는 언론 모두를 같은 집단인 것처럼 비판했다. 그러자 어떤 언론사는 자신들은 ‘검찰발 보도는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고 어떤 언론사는 아예 법조 기자단에서 탈퇴하는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법조 기자단을 하나의 공고한 결사체로 보고 그 이권 카르텔을 깨겠다며 법조기자단 해체를 위해 소송까지 제기한 언론사들도 있다.


 특정 사안에 대한 적정한 보도량을 둘러싼 논란도 이 사건부터 화제였다. 물론 사안에 따라서 그 비중에 맞게 보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는 치열한 쟁점이 되고 있는 사안에서, 한쪽이 아예 사실관계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때 그에 대한 집중적인 취재가 뒤따르는 것을 ‘왜 계속 물고 늘어지느냐’는 취지에서 보도량을 문제삼는 것은 사안의 비중에 맞는 보도라는 잣대를 들이댈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핵심은 사실이 무엇인가에 있는데, 보도량이라는 형식적 측면을 문제삼으면서 사실 자체에 대한 논의를 회피하는 것은 일종의 논점이탈이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언론에 대한 매우 진지한 윤리적 문제제기로 보이는 것들이 실상은 이렇게 보도된 사실 그 자체에 대한 논의를 회피하는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검찰에서 정보를 입수해서 보도하는 것을 문제삼는 논리의 출발점은 ‘검찰은 언론을 활용해 상대방을 압박하는 등 무리한 수사를 하는 나쁜 집단’이라는 것이고, 그런데도 검찰이 주는 정보를 보도한다는 것은 ‘그 정보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검찰의 의도가 실현되도록 하는 나쁜 언론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취재라는 것이 누군가가 갖고 있는 정보를 입수하는 활동이고, 언론에 정보를 제공하는 곳은 누구든, 어떤 의미에서든 나름의 의도, 목적을 갖고 있다. 검찰만이 아니라 경찰도 의도를 갖고 있고, 정치인이나 다른 정부 관료, 경제인 등 언론에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들 모두 나름의 계산을 갖고 있다. 언론은 이런 계산 너머에 있는 그 사안 자체의 사실성, 공익성을 따져 보도를 결정한다. 정보를 흘린 쪽의 의도가 무엇이든 보도는 사실성과 공익성이라는 잣대로 독립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흔히 달을 가리키는데 달이 아니라 손가락을 갖고 시비를 건다는 말을 하는데, 정보 자체가 아니라 정보를 흘린 검찰의 의도를 문제삼는 것이 바로 그런 상황이다.


 실제로 이런 식의 언론에 대한 윤리적 공격이 정파적 문제제기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검찰발 보도에 눈을 부릅뜨는 사람들도 반대편 진영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일 때는 아무도 보도를 문제삼지 않는다는 점에서 쉽게 알 수 있다. 검찰발 보도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언론사도 마찬가지로 다른 사건에서는 검찰 수사 상황을 곧잘 보도한다. 어떤 윤리적 기준이 정말 기준이라고 인정을 받으려면 사안에 따라 적용 여부가 달라져서는 안 된다. 만약 사안에 따라 적용됐다 되지 않았다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기준이 아니다.      


윤리적이지만은 않은 언론윤리 문제’ 제기들


 다시 말하지만 언론윤리는 누구 편을 들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오로지 공익의 편, 사실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검찰발 보도이든, 적정한 비중을 넘어선 과도한 보도이든, 이런 언론윤리적 지적은 어떤 사안에서든 같은 방식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특정 진영이 불리한 이슈에서만 어떤 주장을 제기한다면 그것은 정파적 활동에 불과하다. 그런 정파적 문제제기를 윤리적 문제인 것처럼 자꾸 제기하다 보니 우리 사회에 언론윤리에 대한 논의 자체가 왜곡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언론윤리는 사실 우리 사회에서 정말 진지한 관심사가 되지는 못한다. 현직 언론인들은 언론진흥재단 등에서 실시하는 언론윤리 교육에는 별 관심이 없다. 언론진흥재단의 언론인 연수 업무 담당자들은 그래서 언론윤리 과목을 디지털이나 데이터 등 관심을 끌만한 다른 과목을 강의할 때 끼워넣는 경우도 있다. 혹시 언론사들이 알아서 자체적으로 윤리 교육을 하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언론사는 자기 회사의 언론윤리 규범에 대한 교육도 하지 않는다. 어쩌다가 사고가 나면 잠깐 화제가 될 뿐이다. 다들 언론윤리가 중요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언론윤리는 실제 관심사는 아닌 것이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언론학자들은 수시로 언론윤리 문제로 현직 언론인들을 질타하지만 상당수 언론 관련 학과에서는 언론윤리 교육을 하지 않는다. 실제로 언론윤리 과목이 개설되는 학교가 많지 않다. 사회 전반적으로 언론윤리에 대한 교육이나 이해가 없다 보니 언론에 대한 일부의 정파적 공격이 그대로 윤리적 기준으로 통용되는 현상이 생긴다. 언론윤리는 일부 기자들이 기사와 관련된 사람들로부터 돈을 받거나 명백하게 법을 어기는 등 사고를 쳤을 때만 반짝 관심 영역으로 떠올랐다가 금방 관심 밖으로 사라진다. 


 무엇보다 정파적인 경향이 짙어진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기 편을 들지 않는 언론을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정치적 동기에 따른 공격이 윤리의 외피를 쓰고 횡행한다. 결국 언론 생산자를 움직이는 것은 언론 소비자다. 소비자들이 이렇게 언론윤리라는 칼을 이렇게 사용하면 언론 생산자들은 그에 장단을 맞추기 마련이다. 언론인의 잘못을 소비자에게 떠넘기느냐는 지적이 나오겠지만 잘못된 언론에 박수를 치고, 정상적인 언론을 공격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생산자의 잘못 못지 않은 시장 교란 행위가 된다. 언론이 우리 사회에서 정말 중요한 무엇이라면, 소비자들도 한번은 진지하게 ‘정말 언론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우리 주변에서는 유튜브를 통해 극단적인 주장을 펼쳐 일정한 수의 시청자만 모아도 상당한 수익을 올리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이미 생산자와 소비자의 벽은 예전처럼 공고하지 않다. 이는 언론윤리를 둘러싼 혼란이 이제 우리 모두의 현실적 문제가 되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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