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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고민 11

못 한다는 말

by 매글이

못한다는 말. 일하면서 상사에게는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말이다. 하라는 대로 다 하는 예스맨이니까.


아직도 할 엄두가 안 나는 말이고, 그런 말 할 기회도 없기를 바라지만, 연습은 필요하다 생각하는 중.


오늘 팀장의 지시를 받아 실적을 보고하다가 무의식적으로 엑셀에 익숙하지 않다는 말이 나와버렸다. 의외라는 듯 놀란 팀장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에만 익숙한 나. 그래야만 한다고 강박적인 생각도 있는 나이기에. 그런 말을 의식하고 할 리 없지만 오늘은 의도치 않게 말이 먼저 나와버렸다.


하고나서 잠시.. .내가 묻지도 않은 이 말을 대체 왜 했을까.. 싶었다. 스스로 깎아먹는 말을 할 이유는 없으니까.



하지만 조금 지나니 이런 생각도 들더라. 그래. 못하는 것도 알려야 일이 마구 늘어나는 걸 막을 수 있지. 뭐든 다 잘하는 직원에겐 결국 일만 늘어나는 거야. 일하다보니 그게 조직의 생리더라. 일 잘해서 칭찬받고 기분 좋은 건 한 순간이지만, 일이 늘어나 허덕이다 결국 몸과 정신이 피폐해지는 건 다시 되돌릴 수가 없다.


별 생각없이 나온 말이지만 말하고나니, 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스스로 인정욕구가 강하다 느끼니, 그런 부분을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겠다 마음은 여러번 먹었지만 말처럼 쉬운 부분은 아니다. 그래도 자꾸 생각하고, 내가 바라는 모습을 떠올려보고 하는 시간들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 날이다.


적당히 일하며 살고 싶다. 너무 열심히, 너무 잘하는 직원, 회사에 모든 것을 바치는 직원 말고. 적당히가 대충과 같은 말은 아니니까. 꼴찌는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최고를 지향하지도 않는 중간 정도에서 만족하고 싶다.


어제 유튜브 영상 하나를 보았는데, 마음에 깊이 남았다.

HSP성향인 사람들을 향한 이야기였는데, 테스트를 해보니 나는 극도로 민감한 성향이었고 예상대로였다.


영상에서는그런 사람을 위한 처방을 속 시원히 내려주었다. 하나는 외부 자극에 워낙 민감하다 보니 그런 자극이 없는 안전한 환경을 세팅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그래도 변화를 추구하고 싶다면, 너무 노력하지 말 것, 너무 쓸모있는 사람이 되려하지 말 것이었다.


그간 본 어떤 심리 영상보다도 공감이 갔고, 마음에 남았다.

왜? 죄책감을 없애주는 말들이었으니까.


나에게 안전한 환경을 만든다는 것. 나에게는 퇴사라는 선택지다. 외부 자극에 워낙 민감하다보니, 하고싶은 것만 하며 자유롭게 지내는 삶을 늘 꿈꾸고 있는데, 정말 그렇게만 살아도 되나? 너무 어른스럽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일종의 죄채감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성향을 제대로 안다면, 그 선택 또한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두 번째 방법 역시, 핵심은 "너무"라는 말이다. 뭐든 잘해야 하고, 타인에게 쓸모있는, 의미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있는데, 이 생각이 생각보다 많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쓸모없음의 무한쓸모있음이란 장자의 말을 기억하고 싶다.


쓸모가 있었다면 목수에게 베어버려질 수 있었던 어느 나무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내 안에서 좀더 의미를 찾고, 내가 즐거운 것에 좀더 몰입하며 살아가려 한다.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니, 한 번 노력해보기로 한다. 대충은 하라고 해도 그렇게 하기 힘든 나인걸 아니까. 인생에서 "너무"라는 말만 빼보자. 잔뜩 들어간 힘을 조금은 뺄 수 있을 것이다.


뭐든 지나치면 부족한 만 못하다는 걸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이미 숱하게 경험했다. 이제 경험치를 늘리는 건 그만.


적당히 중간만 가자는 걸 모토로 한 번 지내보자. 해보고 전과 어떤 차이가 있는 지 체감해보는거다. 그리고나서 퇴사할 지 말지를 선택하는 거다.


나만의 안전지대를 구축할 것인지, 그 속에서 성장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지는 그때 다시 판단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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