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부재, 행복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 쾌락주의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들이 말하는 쾌락, 행복은 마음의 평정이라는 해석을 읽었다.
그들은 행복을 고통의 부재라 본다. 행복이 겨우 그거라고?
고통만 없으면 행복한 상태라는 문장을 읽자마자..
무언가 부족하다 느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나에게 견주어 생각해본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무엇인가. 마음이 자유롭고, 평온하며,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상대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는 것. 내가 잘하는 것을 통해 타인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싶은 욕심이 있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선한 영향력에 환장한다고 한다. 좋게 말해 선한 영향력이지, 인정욕구에 기반한 욕심이다.
물론,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나도 영향을 받는 게 좋은 삶이라 생각하지만 나의 존재가치를 지나치게 상대에게 의존하는 경향도 없지않아 있는 것 같다.
여하튼, 현재 시점에서 내가 선한 영향력을 확장하는 게 행복이라 느끼는 것은 부족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격이다. 막상 그런 상태에 도달하면 과연 계속해서 그런 존재감있는 인물이고 싶고, 타인의 인정을 통해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욕심이 계속 생길 지도 모른다.
인간은 가진 것보다는 결핍에 초점을 맞추는 본성이 있기에 현재 상태에서 부족한 부분을 귀신같이 찾게 된다. 그래서 현재에 만족한다는 게 결코 저절로 되지 않는의식적인 영역인 것이다. 감사하기는 만족과 수용의 동의어라 할 수 있고.
자신이 가진 것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그들은 정말 행복해보인다. 일을 하는 것이 놀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고. 나누며 본인 자신이 가장 크게 기뻐한다는것도 느껴진다.
하지만 고통의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이들은 나누지 않는 게 더 고통스러운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충분히 만족하고 자족하는 사람은 나누고자 하는 욕구가 샘솟게 됨을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지. 선한영향력을 미쳐야지. 라는 의지만으로 그런 상태에 도달한다기 보다는, 자신의 모습과 삶에 먼저 만족해야 자연스럽게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겠다.
그들에겐 나눔이 의지의 실천이 아닌, 고통을 없애는 행위일 수 있다. 무언가를 소유해서 얻게되는 행복은 한계가 있다 생각한다. 타인의 인정이라면 계속해서 인정이 뒷받침되어야만 그 행복이 유지될 수 있는데,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영향력을 미쳐 만족스러운 기분은 일시적인 쾌락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
무얼해도 마음이 편안한 상태, 나누고 그만큼 되돌아오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은 상태, 무엇에도 집착이 없는 상태. 어떤 조건과 상황에도 그저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상태가 진짜 행복 아닐까 생각이 든다.
조건부가 되는 순간 그 행복은 일시적 쾌락으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
평온하고 자유로운 인간. 내가 되고 싶은 최종 목표가 결국 행복과 동의어임을 깨닫는다. 현재 상태에서 느끼는 고통을 없애는 노력을 해나가면 된다. 내 마음과 현재 모습이 만족스럽다면 자연스레 상위 욕구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고통을 없애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과정 중의 하나가 나눔이란 실천단계인 것이지. 이 목표를 향해 의지를 발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갖지 못한 것. 없는 것. 부족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현재 가진 것에 충분히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이 행복해지는 지름길이다. 자족하는 하루하루가 모여 만족스런 삶이 되고, 자연스럽게 행복한 삶이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