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 년 전 여성이 내 안에 살아있다는 아득한 연대감
독서 모임이라고 하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딴 세상 얘기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랬던 내가 독서모임, 글쓰기 모임뿐만 아니라 가끔 만나 맥주 한 잔을 기울이는 지인과도 책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인생 참 모를 일이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감명 깊게 읽었다는 내 얘기를 듣고, 생맥주 하나 더! 를 외치던 지인이 적극 공감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보다 훨씬 더 독서량이 많은 친구라 평소에도 책 얘기를 꺼내면 열에 아홉은 이미 읽은 책이라며 본인의 감상을 공유하곤 했었다. 알코올의 힘으로 더 열띤 책 얘기를 하던 그녀는 자신의 인생책이라며 왠지 읽어본 것만 같은 평범한 제목의 책을 추천했다.
배경이, 무려 구석기시대다. 매머드를 사냥하며, 순록 뼈와 가죽으로 오두막을 짓고 살던, 인간의 개체 수가 극히 적었던 2만 년 전이다. 어느 강가에 가면 어떤 혈통 사람들의 오두막이 있고, 보름달이 다음 보름달이 되는 기간 동안 걸어서 도착하는 어느 초원에는 파란 눈 혈통의 사람들의 오두막이 있는, 어느 박물관의 초입에서나 볼 수 있는 구석기시대가 눈앞에 펼쳐진다.
책을 읽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생각한 것은 현재의 우리의 습성이나 정서가 구석기 당시의 생활환경에서부터 이렇게 유래되었겠구나, 하고 유추하게 되는 점이었다. 굶주림과 추위라는 자연의 냉혹함 속에서 인간의 삶은 생존이 단 하나의 주제이며, 그 안에서 사냥을 위한 강한 힘과 권력을 가진 남자들의 리더쉽과 연대는 필수적이다. 죽음이 항상 근처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이 소중하게 여겨지므로 임신, 출산으로 노동력을 생산해내는 여성의 혈통 또한 존중받는다. 그러나 근친으로 인해 건강하지 못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다른 혈통의 여자를 찾아 결혼하고, 그 대가로 가죽이나 칼 등 당시의 귀한 물품을 예물로 주고 받는 문화에선 여성이 혈통을 위한 도구로 느껴지기도 했다.
너무나 신선한 시대적 배경이 밑바탕에 깔려 지속적으로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주인공 야난의 이야기는 범상치 않게 펼쳐진다. 야난은 샤먼의 혈통을 가진 딸로, 출산이 가능한 나이가 되기 전부터 다른 혈통의 남자와 약혼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건은 야난의 아버지로부터 시작된다. 사냥을 위해 다른 오두막 남자들과 연대하는 과정에서 존중받지 못한 야난의 아버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결국 가족을 데리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게 된다. 연대에서 이탈하여 적은 수의 남자로 사냥을 하는 과정에서 결국 야난의 아버지는 죽고, 먼거리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출산을 하다가 어머니도 죽고 만다. 인간이라고는 하나 야생동물의 생존, 번식의 삶과 다를 것이 없어보이는 2만년 전 인간의 삶은 이런 사건 사고로 세밀하게 묘사된다.
야난은 동생 메리와 함께 생존의 위험 속에서 만난, 마찬가지로 무리에서 이탈한 늑대 모자와 연대한다.
"걱정 마. 늑대가 먹여 줬으니까."
"먹여줬다고? 무슨 말이야? 젖을 먹여 줬어?"
"엄마 늑대가 집에 오면 새끼가 입을 핥아. 그러면 엄마 늑대가 새끼를 쳐다보고, 그리고 나를 쳐다 보고는 일부러 토하는 거야. 새끼가 달라고 하니까."
그러고 싶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어미 늑대가 토한 것을 먹게 되었다. 씁쓰름하고 거품이 섞여 있기는 했지만 맛이 신선해서 깜짝 놀랐다. 메리의 말처럼 그것은 고기였고, 어떤 때는 사람을 굶어 죽게 만드는 말라빠진 꿩이나 토끼 고기나 추위에 얼어 죽은 짐승의 가죽이 아니라 젖을 충분히 먹어 살이 토실토실한 망아지나 새끼 순록의 고기일 때도 있었다.
생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야난의 고난이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두려웠다. 인간의 고차원적인 사유가 다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생존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늑대와 연대하여 새끼와 메리를 돌보는 야난은 사냥할 때도 늑대와 합을 맞춘다. 그렇게 야생 동물을 길들여 인간과 함께 하는 가축으로 이어짐을 예상하게 하는 전개에도 인류학자인 작가의 의도가 엿보인다.
살아남아 기존의 무리에 합류한 야난은 여느 여자들과 달리 늑대를 이용하여 사냥할 수 있는 여성이었지만, 오두막의 사람들과 어울려 무난하게 살아가는 데에는 실패한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조화롭게 연대하지 못하고 무리에서 다시 이탈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후 야난의 뱃속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의심받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오두막 안에서 옷을 짓고, 아이를 돌보고, 채집을 하는 여성과 달리 남자들과 함께 사냥을 하고 돌아온 야난에게는, 다른 여자들의 질투와 남편 외의 다른 남자와의 접촉 가능성을 의심받는 것이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여성들이 느끼는, 모성 때문에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모성 때문에 차별받는 사회가 그대로 겹쳐 보였다. 남성과 동등하게 능력으로 인정받고자 하지만, 여성이라는 본질적인 이유로 겪게 되는 차별적 상황에서 평등을 부르짖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이 2만 년 전의 지구에도 존재했겠다는 상상. 그 시공간을 넘어선 공감과 유대감이 아득하고 애틋한 감정으로 다가온다.
결국 다른 사람들과 정서적 연대에 실패한 야난은 자존심을 내세우며 혼자 출산을 하다가 결국 죽고 만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지금, 나는 울며 한탄하며 나 자신의 발자국을 꾸짖었다. 자존심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렀던 지난날의 오만을 생각하노라니 언젠가 어머니가 내 머리를 빗겨 주면서 하던 말이 떠오른다.
"야난, 너도 언젠가는 자라서 한 사람의 어머니가 되겠지. 남자가 고기를 지배하고 오두막을 지배해서 여자보다 월등히 위대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남자가 위대하다면, 여자는 거룩하단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딸들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란다."
나는 어머니의 이 말을 불의 강으로 떠나기 전에 상기했어야 했다. 한 사람의 어머니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이야말로 여자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임을 알아야 했고, 남자들의 독단을 욕하기 전에 여자의 삶이라 해서 결코 비루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옳았다.
그러나...... 나는 다시금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어디에서든,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다. 불의 강이나 여자 호수로 가든, 아니면 스위프트를 따라 털의 강으로 가든, 나는 물러서지 않고 버틸 것이다. 강인하지도 거룩하지도 못하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샐리의 핏줄이니까.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생존, 사냥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야난의 캐릭터는 성장하는 여성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여성으로서의 한계와 굴레를 보여준다. 야생에서의 생존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존으로 배경이 전환되었을 뿐, 현대 사회에서도 여성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출산과 양육이라는 굴레는 현재진행형이다. 물론 많은 부분에서 남녀평등이나 모성 보호와 같은 인식이 커지고 있으나, 이 책에서 우리 여성들에게 외치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불합리한 지점에 집중하여 사회적 연대에서 벗어나는 우를 범할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의 자긍심에 눈을 뜨라는 것이다.
한 인류학자가 한 말을 인용해서 내가 나에게 말해주자. 아이를 낳아 한 사람의 독립적인 인격으로 키우고 있는 엄마로서, 나는 거룩한 존재,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어머니이다. 누가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겠는가. 이 아이의 아버지도, 출산을 장려하는 국가도 아니다. 나 스스로를 거룩하게 생각하는 자긍심으로 나 스스로가 빛난다면, 콧대 높은 가부장적 남성들의 위선이나 모성 보호를 비웃는 시선 따위가 다 무엇인가. 2만 년 전 그 시절부터 우리 여성들은 이렇게 살아왔다. 고기(생존)와 자본, 권력을 지배하는 남성이 위대해 보이는가? 그들을 포함하여, 지구에 인류를 존재케 한 것은 내 몸 안의 우주에 담아 키워낸 우리 여성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