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을 죽여줄 테니 왕비를 내치는 데 협조하라

논픽션 책략과 술수 (2)

by 권경률

책략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교묘히 쓰는 방법을 말한다.


인간 사회에서 일을 이루려면 대체로 사람을 움직여야 한다. 그 일이 나와 상대방에게 모두 득이 된다면 수월하게 풀린다. 문제는 내가 열망하는 일이 논란을 불러일으켜 상대방까지 난처하게 만들 때다. 일을 이루기도 어렵고 성사하더라도 후유증이 크다.


1689년 조선 숙종이 장옥정을 왕비로 만들기 위해 쓴 책략이 그랬다. 정지 작업을 치밀하게 하고 대담하게 밀어붙여서 뜻을 이루기는 했지만 재앙의 불씨를 남겼다.

후궁 소생 갓난아기를 후계자로 삼다


(전편에 이어)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후궁이 된 장옥정은 1688년 10월 드디어 왕자를 생산했다.


28살의 청년 군주는 크게 기뻐했다. 내심 후사를 걱정하던 숙종이었다. 그 시절에는 임금이 그 나이가 되도록 후계자를 얻지 못하면 나라의 걱정거리로 간주했다. 그런데 떡두꺼비 같은 왕자를, 그것도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얻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


해가 바뀌자 숙종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중대 발표를 했다. 새로 태어난 왕자를 원자(元子)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원자는 왕위 계승권을 가진 임금의 맏아들을 말한다. 조선시대 왕의 장자는 통상 2~3살에 원자가 되고, 7~8살에 세자로 봉해져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서인 정권은 발칵 뒤집혔다. 출생한 지 두어 달밖에 안 된 갓난아기를, 그것도 궁녀 출신 후궁의 소생을 후계자로 정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인들은 인현왕후의 나이가 아직 한창이니(23세) 적장자를 얻을 때까지 지켜보자고 했다. 하지만 임금은 신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밀어붙였다. 갓난아기를 원자로 삼고 장옥정을 희빈(정1품 후궁)에 봉한 것이다.


이번에는 서인의 정신적 지주 송시열이 국왕의 처사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숙종은 분통을 터뜨렸다. 송시열은 지난날 효종의 은혜를 입고도 예송논쟁에서 효종을 차남으로 몰아 왕실의 위엄을 깎아내린 자다. 사림의 거목이라 하여 선비들이 떠받들고 있었지만, 젊은 임금이 보기에는 상습적으로 왕을 능멸하는 ‘꼰대’일 뿐이었다.


1689년 2월 숙종은 송시열의 관직과 작위를 빼앗고 도성 문밖으로 내쫓았다. 정권교체의 신호탄이었다. 왕은 서인 정권을 혁파하고 재상, 승지(비서관), 대간(언론), 군부 등 조정 요직을 남인들에게 넘겼다. 기사년의 시국 대전환, ‘기사환국’이다.

기사환국, 왕비 교체 위한 숙종의 책략


정권이 교체되면 서슬 퍼런 사정의 칼바람이 불기 마련이다. 남인 정권은 서인 영수 송시열, 김수항 등에게 극형을 내려달라고 임금에게 촉구했다. 서인들이 9년 전 경신환국 때 남인 영수 허적과 윤휴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니 복수하겠다는 것.


사소한 예법 논쟁으로 촉발된 서인과 남인의 다툼은 어느덧 사생결단의 복수전으로 격화되고 있었다. 숙종의 극단적인 환국 정치가 빚은 끔찍한 부작용이었다.


결국 김수항은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다.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송시열은 일단 죽음을 피했다. 섬에 귀양 보내 가시울타리를 쳤으니 그만하면 됐다는 숙종의 뜻이었다. 얼핏 보면 사림의 거목을 예우하여 관용을 베푼 것 같다. 과연 그럴까?


사실 젊은 임금에게는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알고 보니 진짜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송시열의 목숨을 미끼로 남겨놓았다.


1789년 4월 숙종은 신하들 앞에서 느닷없이 인현왕후의 투기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얘기인 즉 장희빈이 궁에 돌아와 후궁(숙원)이 되었을 때 중전이 돌아가신 부왕과 왕대비를 들먹이면서 헐뜯었다는 것이다.


“중전이 일전에 선왕(현종)과 선후(명성왕후)를 꿈에서 뵈었다며 ‘옥정은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궁에 두면 나라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부인의 투기는 옛날부터 있었지만 어찌 선왕과 선후의 말을 거짓으로 꾸며 임금을 놀라게 하는가. 두 분이 숙원은 아들이 없다고 했다는데 그렇다면 원자는 어떻게 탄생했는가?”(<숙종실록> 1689년 4월 21일)


숙종은 민가에서도 며느리가 거짓말로 시부모를 욕되게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데 하물며 왕가라면 어떻겠느냐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남인들이 송시열에게 극형을 내리라고 재차 청하는 자리에서 나온 말이다. 오호라, 송시열을 죽여줄 테니 서인 왕비를 투기죄로 몰아 쫓아내는 데 협조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남인 정권이라도 중전 폐출에 발 담그기는 꺼림칙했다. 국모이자 본부인을 몰아내는 일이다. 민심이 술렁일 게 뻔하였다.


‘지금 임금이 중전을 쫓아내려고 저러는 건가? 미친 거 아냐?’


그들은 임금의 폭주를 만류했다. 중전 폐출은 안 된다고 읍소했다. 임금의 덕에 누가 될 것이니 불가하다고 했고, 만백성이 우러르는 어머니기에 내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눈에 콩깍지가 씐 숙종은 물러서는 법을 몰랐다. 인현왕후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삼겠다는 그의 뜻은 확고했다. 실은 기사환국으로 남인에게 정권을 돌려준 것도 이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정지 작업이었다.

송시열의 죽음으로 판도가 달라지다


남인 정권이 발을 빼자 왕은 겁을 주기로 했다. 좋은 말로 안 된다면 협박을 하는 수밖에.


때마침 오두인, 박태보 등 서인 86명이 중전 폐출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옳지, 잘 걸렸다. 숙종은 짐짓 노여움을 드러내며 한밤중에 주동자들을 잡아들였다.


왕은 직접 국문장으로 나아갔다. 상소문 중 몇 군데를 꼬투리 잡고 저의가 불순하다면서 극악한 고문을 가하도록 했다.


압슬(사기 조각 위에 무릎 꿇리고 허벅지를 무거운 돌로 누르는 고문)과 낙형(불에 달군 인두로 온몸을 지지는 고문)에도 박태보는 굴하지 않고 임금의 잘못을 지적했다. 격분한 왕은 몽둥이로 입을 치게 했다.


참혹한 고문을 받은 박태보와 오두인은 그 후유증으로 유배 길에 숨졌다.


숙종은 앞으로 중전 폐출에 반대하면 역적으로 다스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남인들도 더 이상 임금에게 토를 달지 못했다. ‘지엄한 협박’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이다.


1689년 5월 2일 인현왕후가 궁에서 쫓겨나 흰 가마를 타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곡(哭)하면서 따르는 이들이 넓은 길을 메웠다.


5월 6일에는 장희빈을 왕비로 삼는다는 숙종의 전지가 내려졌다. 전무후무한 궁녀 출신 왕비의 탄생이었다.


숙종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자 남인 정권에 옜다, 하고 선물을 던져줬다. ‘무엄한’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린 것이다.


서인의 정신적 지주는 왕명을 받들기 위해 제주도에서 뭍으로 나왔다. 스승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기 위해 제자와 문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 무렵 서인 세력은 송시열과 윤증의 ‘회니시비(懷尼是非)’가 널리 알려지며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있었다. 송시열을 추종하는 노론은 소수였고, 그의 치우친 처신과 완고한 성품을 비판하는 소론이 다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송시열이 정읍에서 금부도사가 갖고 온 사약을 받고 쓰러지자 판도가 달라졌다. 비분강개하여 소론에서 노론으로 입장을 바꾸는 이들이 속출하였다.


노론이든 소론이든 이거 하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정권을 되찾고 남인들을 응징하려면 ‘쫓겨난 본부인’ 인현왕후를 앞세워 민심을 얻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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