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 책략과 술수 (3)
1689년 중전이 임금에게 소박맞아 궁에서 쫓겨난 사건은 조선을 뒤흔들었다. 먹고살기 바빠 나랏일에 무심했던 백성들도 이 문제만큼은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민심은 본부인을 내친 숙종을 욕하고 소박맞은 폐비 민씨를 동정했다.
“미나리는 사철, 장다리는 한철.”(황윤석, <이재난고>)
폐비가 내쳐지자 저자와 들판에 퍼져나간 참요이다. 참요(讖謠)는 떠도는 소문을 음악적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시대 상황이나 정치적 징후를 암시하며 빠르게 전파된다.
이 노래에서 미나리는 본부인이었지만 임금에게 버림받은 폐비 민씨를, 장다리는 첩이었다가 국왕의 총애를 받아 중전이 된 장옥정을 가리킨다.
미나리는 민씨의 ‘민’, 장다리는 장옥정의 ‘장’과 발음이 유사하다. 라임을 맞춘 것이다. 뜻을 풀이하자면 본부인은 (미나리처럼) 사철 푸르고, 첩은 (장다리처럼) 잠깐뿐이니 정신 차리라는 말이다.
숙종의 잘못된 처신을 비판하고 폐비의 복위를 바라는 민심이 노래에 깔려 있다.
여기에는 본부인과 첩에 대한 보편적인 정서가 작용한다. 혼인은 사회 질서의 바탕을 이루는 백년가약이다. 혼외 관계로 인해 혼인이 깨지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이것이 본부인을 옹호하고 첩을 경계하는 정서로 나타나는 것이다.
더구나 왕실은 모범을 보여야 할 터이다. 중전은 본부인이고, 후궁은 첩이다. 첩을 중전에 앉히기 위해 국모를 내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권을 빼앗긴 서인들도 뿔난 민심의 흐름에 올라탔다. 김만중은 한글소설 <사씨남정기>를 지어 세상에 내보냈다. 그는 숙종의 첫 번째 부인 인경왕후의 숙부로 서인 집안 출신이었다. 한글소설을 쓴 것은 백성들이 널리 읽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씨남정기>에서 한림학사 유연수는 현숙한 부인 사씨를 내치고 간악한 첩 교씨를 집에 들였다가 신세를 망친다. 유연수는 숙종, 사씨는 인현왕후, 교씨는 장옥정을 빗댄 것이다. 장옥정을 악녀로 낙인찍고 인현왕후의 복위를 선동하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하다.
궁궐은 나라의 모든 소식이 흘러 들어가는 곳이다. 왕비 교체를 질타하는 민심을 임금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숙종은 남인 정권을 방패막이 삼아 책임을 회피하면서 민심의 향배를 예의주시했다.
변화의 조짐은 1693년 숙종이 새 후궁을 들이면서 나타났다. 그해 임금은 무수리 최씨를 숙원으로 삼았다. 무수리는 궁에서 물 긷는 하녀를 말한다. 나인보다 밑에 있는 최하급 궁인이다. 숙종은 왜 이렇게 천한 신분의 여인을 가까이 했을까?
궁녀 출신 왕비 장옥정은 나인들의 욕망을 경계했다. 신데렐라는 자기 하나로 족했기 때문이다. 특히 왕족의 시중을 드는 젊은 지밀나인들을 엄히 단속했다. 왕이 천한 무수리를 품은 건 그래서다. 중전의 단속망을 피해서 하녀를 넘본 것이다.
야사에는 최씨가 쫓겨난 폐비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임금이 우연히 보고 그 의리에 감동해 동침했다고 한다. 짐작하건대 국왕의 체면을 고려해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장옥정에 대한 숙종의 불같은 애정은 식어버린 게 분명했다. 부부 사이가 삐걱거린다는 소문이 궁궐 담장 밖으로 흘러 나갔다.
그러자 남인 정권이 전전긍긍했다. 안 그래도 민심이 안 좋은데 임금마저 변심하면 큰일이다. 인현왕후 폐출과 송시열의 죽음이 몰고 올 후환이 두려웠다.
남인 정권은 초조한 나머지 무리수를 뒀다. 서인 세력의 정변 음모가 드러났다며 옥사를 일으킨 것이다. 서인들도 맞불을 놓았다. 중전의 오빠 장희재가 임금이 총애하는 숙원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고변이 들어왔다.
숙종은 옥사를 과하게 부풀린 남인 정권을 숙청하고 사랑하는 후궁의 편에 선 서인들에게 다시 정권을 넘겼다. 1694년 갑술환국이다. 이 또한 기사환국처럼 왕비 교체를 위한 정지 작업이었다.
왕은 폐비 민씨를 복위시켜 민심을 얻고자 했다. 그냥 궁에 데려와서는 티가 안 난다. 기왕이면 모양 좋게 꽃가마에 태워야 한다. 감동적인 드라마가 필수다.
임금과 폐비는 극진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숙종실록>에 실려 있다. 중간에 감질나는 ‘밀당’도 있고, 거의 연애편지를 방불케 한다.
“때로 꿈에 만나면 그대가 내 옷을 잡고 비 오듯 눈물을 흘리니 어찌 다시 만날 날이 없겠는가?”(숙종의 편지)
“첩의 죄는 죽어 마땅한데 목숨을 보전한 것은 성은에서 나왔습니다. 천만뜻밖에 옥찰이 내려지니 감격의 눈물만 흐를 뿐입니다.”(폐비의 답장)
“답장을 읽으니 만나서 이야기한 것 같구려. 열 번이나 펴보는데도 매번 눈물이 납니다. 옷과 가마를 보낼 테니 이제 돌아오시오.”(숙종의 답장)
“옷과 가마가 다 분수에 넘쳐 감당할 수 없습니다. 도로 거두시면 마음이 편할 듯합니다.”(폐비의 사양 편지)
“또 번거롭게 하는구려. 지나치게 사양 말고 오늘 들어와야 하오. 몇 글자라도 회답해주오.”(숙종의 독촉 편지)
1694년 4월 12일 숙종은 인현왕후를 창덕궁 경복당으로 맞아들이고 그날부로 장옥정을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장희빈은 울화통이 터졌다. 그녀는 세자(훗날의 경종)의 생모다. 중전 자리는 당연히 자신의 것인데 빼앗겼다고 여겼다.
제주도로 유배 간 오빠 장희재를 대신해 첩 숙정이 나섰다. 정권을 빼앗기고 지리멸렬한 남인들을 모아 어설픈 자작극을 벌인 것이다.
숙정과 남인들은 하인을 시켜 희빈의 부친 묘비를 훼손하고 무덤에 저주 물품을 묻은 뒤에 서인들의 짓으로 몰려고 했다.
그러나 이 자작극은 하인이 술에 취해 떠벌이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이 때문에 희빈은 한층 곤란한 처지가 되었다.
장희빈을 더욱 궁지로 몬 것은 중전 민씨, 곧 인현왕후였다. 중전은 1699년 무렵부터 종기를 앓으며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오라비 민진후 형제가 병문안을 오자 인현왕후는 이 병이 장희빈 때문이며 궁녀들도 모두 희빈에게 붙었다고 하소연했다.
1701년 8월 결국 중전이 세상을 떠나자 후폭풍이 밀려왔다. 인현왕후의 상을 치른 지 40여 일 만에 숙빈 최씨가 장희빈의 무고(巫蠱)를 고변한 것이다. 희빈이 취선당 서쪽에 몰래 신당을 차리고 무녀를 불러들여 왕비를 저주했다는 충격 제보였다.
숙빈으로서는 살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인현왕후가 죽자 세자의 생모 희빈이 다시 중전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궁궐에 파다했다. 그리 되면 인현왕후의 복위에 기여하고 그 은총을 누린 자신과 왕자 연잉군(훗날의 영조)은 앞날이 캄캄했다.
숙종은 특유의 극단적인 성품이 발동하며 노발대발했다. 왕은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희빈을 자진케 하라는 명을 내렸다. 희빈이 받아 든 것은 오매불망 고대하던 중전 복위 교서가 아니라 한때 사랑했던 남자가 보낸 사약이었다.
“이제부터 나라의 법전을 명백하게 정하여 후궁이 왕비의 자리에 오를 수 없게 하라.”(<숙종실록> 1701년 10월 7일)
숙종은 장희빈 사사(賜死)를 계기로 후궁의 왕비 책봉을 금함으로써 본부인과 첩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자 했다. 혼인 질서를 바로잡는 모습을 보여 세자의 생모를 죽이는 과한 처사에 그럴듯한 명분을 부여한 것이다.
희빈의 죽음과 함께 남인도 몰락했다. 피 튀기는 당쟁의 주역은 서인 내 노론과 소론으로 바뀌었다. 두 붕당은 왕위 계승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다. 소론은 장희빈이 낳은 세자를 후원했고, 노론은 숙빈 최씨 소생인 연잉군을 밀었다.
1720년 숙종이 세상을 떠나고 세자 이윤이 보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조선 제20대 왕 경종이다. 그러나 병약한 임금은 즉위 4년 만에 배다른 동생 연잉군의 돌봄을 받다가 세상을 떠난다. 조선은 결국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