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과 아부
군인은 부대에서 경례를 할 때 구호를 붙인다. 내가 군 복무 할 때 우리 부대의 경례 구호는 ‘충성’이었다. 그런데 가까운 데 있던 다른 부대는 ‘필승’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가끔 밖에서 옆 부대 병정들을 만나면 입씨름이 벌어지곤 했다. 단골 메뉴 중 하나는 ‘충성’과 ‘필승’ 가운데 어떤 경례 구호가 좋은가, 하는 것이었다.
해병대 전우 분들께는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도 ‘충성’이 더 좋은 구호라고 생각한다. 우직하고 진실한 인간미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파이팅 넘치는 ‘필승’도 나쁘진 않다.^^)
‘충성’이라는 말은 한국인의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끼쳐왔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학창 시절 조회 시간마다 들었던 ‘국기에 대한 맹세’다. 국민의례 절차라 의식이나 행사를 하면 으레 경례곡과 함께 이 맹세문이 흘러나왔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1972년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고 한다. 내가 들었던 맹세문은 1974년에 확정된 것이다. 길을 걷다가도 국기 게양식 및 하강식이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거나 거수경례를 한 채로 태극기에 충성을 맹세했다.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조국과 민족의 영광을 위해 (국민이)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은 ‘전체주의적 발상’이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었다. 이런 여론을 수렴해 2007년에 맹세문을 개정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국민의 권익과 직결되는 자유와 정의를 앞세우고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짐하고 있다. 그것도 ‘굳게’ 다짐한다.
충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어려서부터 조국과 민족, 그리고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짐하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충성의 뜻을 음미해 볼 기회는 별로 없다.
충성이라고 하면 대개 애국이나 복종을 먼저 떠올린다. 권위주의 시대의 ‘국기에 대한 맹세’도 뉘앙스가 그랬다. 이런 생각은 악용될 수 있다.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대문호 오스카 와일드는 “애국은 사악한 자의 미덕”이라고 했다. 국가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자들은 악당이나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20세기에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독일 나치즘과 일본 군국주의가 대표적인 예다.
충성(忠誠)은 본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을 뜻한다. 근대 이전에는 주로 임금에 대한 신하의 덕목을 가리켰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이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가 나온다.
고려 제26대 충선왕(재위 1298, 1308~1313)은 충렬왕과 원나라 제국대장공주의 소생이다. 중국을 평정하고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라 고려 국왕 이상의 권능을 가졌다.
고려에서 왕 노릇한 기간은 6~7년에 불과했다. 아버지와 권력투쟁을 벌이며 번갈아 보위에 올랐다. 그래서 원나라에서 살았던 기간이 훨씬 길다.
1308년 충렬왕이 세상을 떠나자 충선왕은 복위하기 위해 고려로 돌아와야 했다. 이때 원나라에는 그와 깊은 정을 나눈 여인이 있었다. 귀국할 때 정인이 뒤따라오자 왕은 연꽃 한 송이를 꺾어 이별의 정표로 주었다.
정인과 헤어진 충선왕은 밤낮으로 그리워했다. 견디다 못해 문신 이제현(1287~1367)을 보내 여인을 살펴보게 했다. 이제현이 가보니 그녀는 누각에 있었는데, 곡기를 끊은 지 여러 날이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충선왕이 보낸 사람이라고 하자 원나라 여인은 겨우 붓을 들어 절구 한 수를 썼다.
“이별할 때 주신 연꽃 한 송이(贈送蓮花片) / 처음에는 선명하게 붉더니(初來的的紅) / 꺾인 지가 지금 며칠이런가(辭枝今幾日) / 나처럼 초췌하게 시들어 가네(憔悴與人同)”
이제현은 그 시를 갖고 돌아왔으나 임금에게 전하지 않았다. 보고도 사실대로 하지 않았다.
“여인이 술집에 들어가 젊은 사람들과 술을 마신다고 하기에 찾아보았는데 없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임금은 그녀에게 정을 준 것을 후회하며 땅에 침을 뱉었다.
이듬해 왕의 생일에 이제현은 술잔을 올리고 뜰 아래로 물러나 엎드렸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용서하지 마소서.”
충선왕이 까닭을 묻자 그는 여인이 쓴 시를 올리고 진실을 밝혔다. 임금은 초췌하게 시들어갔을 여인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이제현을 벌하지는 않았다.
“그날 만일 이 시를 보았더라면 죽을힘을 다해서 돌아갔을 것이다. 경이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속인 것이니, 참으로 충성스럽도다.”
군주를 속였으니 이제현은 분명 죽을죄를 지었다. 그러나 임금은 그가 자신을 속인 것이 목숨 걸고 왕업을 지킨 충성임을 알아보았다.
만약 그리하지 않았다면 고려 왕위에 큰 미련이 없었던 충선왕은 원나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심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영국 왕위를 내려놓은 에드워드 8세보다 600여 년 앞서 왕좌와 사랑을 바꾼 군주가 되는 셈이다.
충성(忠誠), 참마음에서 우러나온 정성은 신뢰를 키운다. 충선왕은 1313년 왕위를 아들 충숙왕에게 물려주고 원나라 대도로 돌아갔다. 그곳에 만권당을 짓고 중국의 문인·학자들을 모아 경서와 역사를 연구하고 토론했는데 고려에서 이제현을 불러 함께하도록 했다.
원나라에서 학문을 갈고 닦은 이제현은 이후 고려 성리학을 중흥하고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충선왕은 황제의 명으로 강남을 돌아볼 때도 이제현이 없어서는 안 된다며 따르게 했다. 얼마나 신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럼 충성과 대척점을 이루는 말은 무엇일까? 불충이나 반역을 떠올리기 쉽겠지만 나는 ‘아부(阿附)’라고 생각한다. 남의 비위를 맞추어 알랑거리는 ‘가짜 충성’이기 때문이다.
<용재총화>에 또 다른 일화가 실려 있다.
충선왕의 손자 충혜왕은 배우희(俳優戱)를 잘하는 장사랑 영태를 총애했다. 영태는 충혜왕을 수행하여 사냥을 나갈 때마다 재담과 익살로 즉흥극을 해 분위기를 띄웠다. 하루는 왕이 영태를 물에 빠뜨렸다. 영태가 물을 헤치고 나오자 왕이 껄껄 웃으며 물었다.
“지금 어디 갔다가 오느냐?”
영태는 능청스럽게 답하였다.
“굴원을 보러 갔다가 왔습니다.”
굴원은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정치가이자 시인이다. 초 회왕 때 좌도에 임명되어 국정을 자문했으나 모함으로 인해 신임을 잃자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멱라수에 몸을 던져 죽었다.
충혜왕은 굴원이 뭐라 하더냐며 농을 이어갔다. 이에 영태는 아부의 진수를 보여줬다.
“굴원이 ‘나는 어두운 임금을 만나 강에 몸을 던져 죽었지만 너는 밝은 임금을 만났는데 어찌 왔느냐?’ 하였습니다.”
그러자 왕이 기뻐하며 은사발 하나를 하사했다고 한다.
충혜왕은 이런 아부꾼들을 가까이 두고 상식에서 벗어난 악행을 저지르다가 원나라 조정으로 압송되어 유배길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의 사망 소식은 곧 고려로 전해졌지만, 나라 사람들이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 왕은 충렬왕부터 충정왕까지 6대에 걸쳐 원나라 황제에게 ‘충(忠)’자 시호를 받았다. 제후국의 군주로서 황제에게 충성하라는 의미다. 원나라 황실의 피가 섞인 고려 왕들은 과연 진심에서 우러난 정성으로 황제를 대했을까?
충성은 오늘날에도 조직 사회에서 용인(用人)의 기준이 된다. 충성과 아부를 분별하여 사람을 쓰는 안목이 조직의 성패를 가른다. 일반적인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진정성을 가지고 정성을 쏟는 사람이 안 그런 사람보다 믿음이 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회생활에서의 진정성은 있는 그대로 몽땅 드러내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진정성을 선호하지만 100% 민낯을 원하지는 않는다. 생각과 감정을 하나하나 다 보여주는 건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고 자기 자신은 위험하게 만든다.
진정성에는 만들어지는 부분도 있다. 진실하다는 신호를 보내며 매력적으로 연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떤 의미에선 진정성 있게 충성스러워 보이는 것도 기술이다. 갈고 닦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