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빼고 덜어내기 -마음 편
2022년 12월 21일 도망치듯 한국을 빠져나와 도착한 곳은 독일 뮌헨이었다.
출발부터 순탄치는 않았다. 함께 가려던 나의 하나뿐인 딸(고양이) 파이는 독일 입국 시에 필요한 검체결과가 출국 예정일 안에 나오지 않았고, 함께 올 수 없었다. 또 신랑은 회사일이 바쁜 시기라서 독일에서 시차를 극복하며 재택근무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몸이 좋지 않은 나는 영어로 된 처방전을 품에 꼭 안고, 약을 한 보따리 들고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출발 5시간 전, 새벽부터 눈이 가로로 흩날리는 서울 하늘. 빨리 이 하늘을 벗어나고 싶었다. 새벽 내내 짐을 체크하느라 겨우 두 시간 잠을 자고 인천공항으로 출발 한 우리 부부는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공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짐을 수속하는 중에 바로 문제가 발생했다. 내가 메고 있던 바이올린과 기내 수하물(작은 캐리어)을 함께 수속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역시 경험에 의존하지 말고 아시아나 측에 전화해서 직접 물어봤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하기엔 늦었다. 빨리 대뇌를 풀로 가동해 이 난관을 헤쳐나가야 했다.
위탁 수하물 2개, 기내 수하물 1개, 신랑이 메고 있는 백팩, 내 바이올린을 추가 요금 없이 탑승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바이올린을 짊어진 채로 기내 수하물에서 작은 가방과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신랑은 백팩과 기내 수하물 한 개를 들었다. 그리고 위탁 수하물 2개를 화물로 보냈다.
그렇게 우리는 고비를 넘겼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탑승 시간을 기다렸다.
드디어 비행기에 올라 자리를 찾아 앉았다. 짐을 다 정리한 뒤에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쯤 잤을까? 꽤나 개운한 기분으로 일어나서 창가를 내다보았는데.
세상에!
비행기는 인천공항 활주로 위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비행기 날개 위에 얼어붙은 눈이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새벽에 공항버스에 오를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이 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오전 9시 출발 예정이었는데 어느새 11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기차가 몇 시였지?"
우리의 아파트는 뮌헨에 있었기에,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기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루트였다. 충분히 여유 있게 예약했다고 생각한 기차표였는데, 비행기 연착으로 인해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당시 돈 조금 아끼자고 취소가 불가능한 표를 예매했기 때문에 기차표 취소도 불가능했고, 기상악화로 인한 보상은 당연히 없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에어플레인 모드로 다시 기차표를 예매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때 문득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기내에 와이파이가 제공되는 거 알아요?"
확실히 찾아본 정보는 아니었지만, 언뜻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을 전했다. 그리고 마침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저희 아시아나 항공은 기내 와이파이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으며...'
신랑은 서둘러 기내 와이파이를 결제했다. 그런데 너무 느리다. 정말 화가 날 정도로 느리다. 초고속 인터넷에 길들여져 있는 한국인의 피가 끓어오르다 식다를 반복하다 보니 기차표를 예매할 수 있는 페이지가 열렸다. 그런데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예상치 못한 일은 연달아 일어났다. 독일은 11월부터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크리스마스가 끼어 있는 주에 기차표를 구하는 것이 쉬울 리 없었다. 생각보다 비싼 표 가격에 놀란 우리 부부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지금 사는 게 맞나? 비행시간이 더 지연되면 어떡하지? 독일에 도착한 뒤에 사야 하나? 이왕 비싸게 사는 표라면, 더 비싸더라도 취소가 가능한 표를 결제해야 하나?
순간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고 우리는 열띤 토론과 고민을 반복했다.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다가 신랑이 눈 딱 감고 결제를 끝냈다. 그렇게 잠시동안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기차표와, 새 기차표의 비싼 가격이 한참 동안 마음속을 헤집고 다녔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모든 기차표가 사라졌다. 순간 더 고민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등골이 오싹했다. 역시 내디딘 한 발이 삐끗했다면 빠르게 다른 발을 디디는 것이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