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라는 대상과 강강수월래>
성찰과 사유가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내 안의 깊은 주체인 참나를 허구적 맥락으로 도치시키는 형태, 자아력 형성의 의미를 내포하며 전진하는 과정은 꽤나 삶이라는 부분에 있어 유의미하다.
[부풀어감]과 [팽창함], 이라는,
사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 구석의 단어를 매달리며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종속시키며 나열하는 일들은 인간이라는 실체가 결코 주체 자체로 변모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우리의 인식과정이 겪는 한계 속에서 또 한 번 타자를 통한 확장을 겪기까지,
건강한 주체 자체로 성립되기를 익명의 자아가 또다시 말한다.
허무를 안고 살아가면서도, 존재 진위를 묻는, 열차 밖 흐려지듯 뭉개지던 풍경 속- 다시 창 속 나를 마주하던 순간처럼,
내가 나이기를 잠시간 멈출 수 있기에, 우리는 그 빈 공실을 인식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찰나로 의미 지을 수 있다면, 우리의 하루가 얼마나 많은 흉내로 자리 잡혀가고 있었는 질 마주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25년 봄, 실체의 육신을 끊임없이 달리는 세계의 운송체 속에 실었다. 무용성이라는 간편한 과정을 나의 정체성에 흠뻑 적시기 위해서, 증명이라도 해내듯 매일 같은 아침을 맞으면서도, 식사를 차리면서도, 용변을 보면서도, 끝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중압을 내 안에서 져버리길 반복했다. 그와 동시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나는 살아가고 있구나.라는 과제와 같은 증명을 직시했지만, 바래버린 작업욕과 사회성, 정지해 버린 내실의 격차를 무력하게 감내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차원의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앞서 말했던, ’ 타자로 단정됨을 흉내내기‘라는 개념 안에서 대체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순히 개념을 받아들이고, 생각을 비워 체화해 내었으면 됐다.라는 식의 간편 조리식 과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선은 나에게 들어맞는 흉내의 과정을 모색했다. 대학시절 늘 손에 들려있던 펜촉과 120mm 필름카메라가 맞은편의 무언가를 상정해 내기에 적합한 도구라고 섣불리 단정 지었다. 그 후에 삶의 과정 중에서 ‘조용한 흥분’을 흠모했다. 꽤나 변태적인 표현과 그에 걸맞은 내밀하고도 개인적인 인식의 상황들이란 생각을 하였다. 이미지가 갖는 한계는, 그 뜻을 내포시키고자 하는 객체와 인식하고자 하는 대상의 불완전성에 있다.
갈대와도 같이, 이 다리 건너 다른 차원에 도달하면 색을 잃는다는 이러한 살얼음과도 같은 과정들은 주체를 연결 짓고, 인식을 다리 삼아 결론에 도달하고자 하는 나의 의지를 설명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들어맞지 않고, 더는 나아갈 여지가 없음을 인정하던 때도 있었고, 이미지 자체의 회유를 일삼는 주변인들을 조용한 심정과 함께 쓴 목을 삼키기와 함께 반복하였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유물론적인 창작을 하며, 동시에 닮고자 하는 대상, 그 속성이 끝맺음시키기를 나는 간절히 원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나치게 무언가를 권유하는 이미지도 아니고, 한 찰나와, 구석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그 모든 것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추신: 이미지 파생물 『귀향, 인식』과 『Image bl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