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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진복 Apr 01. 2024

죽음을 당당히 바라보며 준비하는 엔딩노트를 시작합니다

오늘은 글을 쓰려니 조금 숙연해집니다. 

무슨 글을 쓰려고 그렇게 폼을 잡나요?

유언장을 미리 써 보려고 합니다.      

이유가 있나요? 

네. 지난 삶을 회고해 보면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을 합니다만 다소 아쉬웠던 점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좀 더 의미 있고 후회 없는 삶을 위해 유언장을 쓰고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고쳐나가 보렵니다.      

유언장의 주요 내용은 나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 가장 슬펐던 기억, 가장 후회되었던 기억, 주변 사람들에게 또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내와 아들에게 전하는 말 순으로…      

"남은 후반전 삶의 소중한 가치를 위한 나만의 유언장"을 써 보겠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성찰해야 한다.” 

이병찬 한국죽음준비교육원 원장은 죽음의 문턱에서 삶의 지표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약 15년 전에 불치에 가까운 병을 얻고 조용히 죽음을 맞기 위해 산속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욕심, 탐욕, 집착이 만병의 근원임을 깨달았다. 

그 뒤 몸이 호전되자 아예 ‘행복한 죽음의 전도사’로 나섰다.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

‘잘 죽는 것’이 곧 ‘잘 사는 길’이다. 

이것이 ‘웰다잉’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죽게 마련이다.

죽음을 준비하면 성찰하게 되고 세상 살아가는 자세가 달라진다.

이 세상을 떠나면서는 모든 짐을 버리고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망자나 가족에게 한이 맺힌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죽음을 준비하면 희망이 보인다.

‘죽음 준비’라는 말이 너무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다.

일상생활하면서 준비할 방법은 없는가?

하루하루 ‘임종 노트’(죽음의 노트)를 쓰라고 말하고 싶다.

자기의 일상생활을 적는 일기와는 다르다. 

‘임종 노트’는 일종의 유언장처럼 생각하면 된다.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임종 노트를 쓰면 그것이 곧 유언장이 되며, 

항상 자기를 되돌아볼 수 있다.      

품위 있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이병찬 한국죽음준비교육원 원장     


가족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내가 사랑한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살면서 가 볼 뻔했고 가 보지 못했던 곳으로 긴 여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이전의 여행들과는 달리 아마 이 여행에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나는 그곳에서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두려운 마음보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호기심을 안고 큰 기대를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떠나려 합니다.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유년과 학창 시절은 나름 성실하게 잘 지내왔습니다. 

1980년 고등학교 시절 점심 도시락을 옥수수밥으로 싸 가지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옆 짝이었던 00친구가 쌀밥하고 바꿔 먹자고 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고마웠던 친구가 그립습니다. 여행 가기 전에 한번 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습니다..

/

1988년 9월 1일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사명감과 소명의식으로 소방관이 되었습니다.

언제 건물이 무너져 덮칠지 모르는 화재 현장으로 늘 달려 가야만 했던 소방관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는 멋있어 보이지만 내면으로는 아픔이 많은 직업이었습니다.

소방관들은 각종 재난 현장에서 사고의 참혹한 광경을 많이 목격을 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우울증 등 외상 후 스트레스를 겪는 동료 소방관들이 지금도 많이 늘어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난 동료들도 많이 보아 왔습니다.

또한 재난 현장에서 국민들을 구조하다가 하늘나라로 여행을 먼저 떠난 동료들도 있었고요.

소방관의 삶은 숙명인 듯싶습니다.

우리 동료 소방관들은 자기 죽을 줄 모르고 불길 속에 몸을 던집니다.  

소방관이 살아야 국민들의 안전도 지켜줄 수 있는데 말입니다.     

<불꽃의 희생자>     

불길을 향해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용기와 희생의 상징이었다

그의 마음은 불타는 화염과 같았고

그의 몸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소방관은 마치 불의 춤사위를 추며

무모하게 불길에 던져졌다

그의 숨결은 불꽃의 열기로 넘쳐나며

그의 눈동자는 불꽃의 빛으로 빛났다

그의 몸은 불길에 휩싸여

끊임없이 타오르고 사라졌지만

그의 마음은 우리 마음에 영원히 남아

희망과 용기를 주는 불꽃처럼 타오른다     

주진복(기공메자)     

저는 35년의 기나긴 소방관 생활 중 굴곡이 참 많았습니다. 

소방사(9급/순경) 공무원부터 시작해 소방서장(4급 서기관/총경)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세 분의 멘토 덕분이었습니다.

여행 떠나기 전에 먼저 간다고 감사 인사를 전해 줘야 하는데 말입니다.

시간이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삶에 가장 아팠던 것은 소방관 시험 합격 후 임용 대기 중 연탄가스 중독 사고, 신임 소방공무원 기본 교육 가던 중 빗길 차량 10m계곡 추락 사고, 뇌출혈과 선천성 뇌혈관 기형 등으로 머리를 열고 수술했던 경험 등 세 번 하늘나라 문턱까지 갔다 왔습니다.

이 세 번의 큰 사고를 겪으면서 저의 삶은 180도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엔딩노트에 유언장을 쓰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

우리가 죽고 나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돈, 권력, 명예가 뭐 그리 대단하고 중요하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죽기 전에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2022년 1월 4일 자 춘천 소방서장으로 부임하면서 나의 삶은 또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시기여서 "직원들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직장 내 메신저를 활용해서  공감 가는 글을 써서 직원들과 소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블로그 등 SNS를 시작하게 되었고 전자책과 종이책 출간까지 이어졌습니다.

나의 인생 책을 한번 씀으로써 역사에 영원히 기록되는 참맛을 느껴 봤지요.

내 나이 58세에 독서와 글쓰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것을 실감했고요.

앞으로 긴 여행 가기 직전까지 책  읽기와 글쓰기는 나의 보물 1호가 될 것입니다.

/

나의 인생 후반전 삶에 동반자가 되어 주신 6,737명의 SNS(블로그 4,139명 / 인스타 403명 / 스레드 2,126명 / X 69명) 이웃분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는 전하고 여행을 가야겠다 싶었습니다.

제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삶을 살아보니 인생이란 놈은 마치 스포츠 경기와 같습니다.

전반전은 그저 학력, 직위, 권력, 돈 같은 것을 얻기 위해 경쟁하며 열심히 달려 살아왔습니다.

전반전의 승부는 앞서 말한 것에서 남들보다 높고 많으면 승부에서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전반전이 끝난 후 맞이한 인생의 후반전은 전혀 달랐습니다.

인생 후반전은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 아닌 오직 자기 자신과의 경쟁입니다.

전반전을 승리하기 위하여 매일 야근하며 일에 몰두하고 몸담고 있는 소방조직의 인력 확충을 위해 국회 등을 쫓아다니다 보니 하나밖에 없는 몸은 많이 지쳐서 예전과 같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제 깨달음을 얻은 것 같습니다.

건강하지 않다면 그동안 쌓아 왔던 모든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일개 소방서장이 뭐 대단하고 중요하겠습니까?   

치열하게 경쟁하는 삶도 중요하지만 건강은 반드시 챙기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바로 돈도 지위도 아닌 내가 갖고 있는 건강한 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라도 더 갖겠다는 욕심 보다, 여유가 되시면 양보하고 베푸는 삶을 살아보면 어떨까요?

지금 전반전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은 너무 아득바득 살지 말고 자기 몸을 돌봐가며 지금 하고 있는 스포츠를 단거리 경주가 아닌 마라톤이라고 생각하며 하나하나 차근차근 쌓아 올려 나가시기 바랍니다. 

저와 함께 후반전에 이미 돌입하신 분들은 나이가 들었다고 좌절하지 마시고 아직도 남아있는 길고 긴 인생, 행복한 말년을 위해 지금부터라도 자신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건강이 최고입니다.

저의 엔딩 노트를 사랑하는 온라인 이웃님 여러분께 보여 줄 수 있음에 따뜻한 기쁨을 느낍니다.

/

이제 마지막 인사 차례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에게 말입니다.     


그 누구보다 피부가 곱고 예쁜 아내에게     


여보! 우리가 결혼한 지 벌써 27년이 되었네. 

박봉의 소방공무원인 나를 만나 푸른 꿈을 안고 13평짜리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차렸지.

당시 소방관들은 24시간 근무하고 24시간 쉬는 근무체계였고 대형 산불 등으로 비상소집 근무가 많다 보니 소방서 생활이 절반 이상이었고 가족이 있는 집은 거의 하숙집이나 다름없었습니다.

1998년 8월 우리 부부의 합작품인 아들이 태어났을 때가 가장 기뻤어.

출산하는 여보 옆에 같이 있어 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했어.

그때는 직장 일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랬는지 모르겠어.

또 하나, 젊은 시절 친구와 직장 동료들과의 술자리가 많아 늘 늦게 귀가해서 자기하고 많이 다퉜던 일들이 생각나네. 

역지사지라고 당시 자기 마음은 어땠을까 생각을 해 봤어.

나 같았으면 벌써 이혼하자고 했을 것 같아.

자기는 어린 아들 혼자 케어하며 그 속상함을 가슴속에 묻고 참아 줬지.

내가 왜 그랬을까? 반성을 많이 해. 사람이 좋아서, 술이 좋아서 둘 다인 것 같아.

그렇게 우리의 젊은 시절은 흘러갔고 어느 조직이든 직장 사회는 승진이 가장 큰 기쁨인데, 저는 6급(소방위) 승진 시험에서 두 번 떨어지고 세 번 만에 합격을 했습니다.

당시 시험 일자는 법으로 정해져 있는데 매년 9월 첫째 주 휴일이었지요.

여보! 내가 소방위(6급) 시험공부 때문에 3년 동안이나 여름휴가를 못 갔던 게 못내 후회가 많이 드네.     

그래도 자기가 휴가 못 갔다고 불평  하나 안 하고 남편이 시험공부에 열중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많이 줘서 삼수 만에 합격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 

고맙고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어. 

남편 시험 합격에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당신 모습도 눈에 선하네.

소방간부 시험에 합격하면서 가족이 있는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영월 소방서에 근무하며 주말부부 생활을 할 때 남편 밥 굶을까 봐 밑반찬을 바리바리 싸 주었던 자기의 손맛이 또한 기억나네. 

2005년 9월 나의 첫 번째 멘토이신 당시 000 소방서장님 도움을 받아 상급부서인 강원도 소방본부로 발탁되어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소방본부로 발령 나기 전 퇴근 후 숙소에서 저녁 먹고 자기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어.

"여보! 우리 춘천 가서 한번 살아 볼까." 라고 했더니

자기가 "여보! 뭘 망설여. 갑시다."라고 했던 거 기억나지.

그때 자기의 '갑시다'라는 메시지가 없었다면 우리의 삶은 우물 안의 개구리(조그만 도시에서의 생활) 신세였을 거야.

그렇게 우리는 강원도 수부도시인 춘천으로 거주지를 옮기게 되었고 저는 소방본부에 근무하며 또 한 번 삶의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보! 내가 본부에서 근무할 때는 일에 미쳐 살았던 것 같아. 

자기도 기억나지.

또 조직을 위한답시고 관계되는 사람과 술 마시는 날이 많았지.

일+술 덕분에 소방서장(4급 서기관)까지 승진은 할 수 있었지는 모르겠어.

그렇다고 나는 절대 인사·승진 청탁한 적은 없다는 거 자기도 알지. 혹시 이웃님들께서 오해 하실라. 

반면에 집은 하숙집이었고 우리 아들 커 가는 모습을 보지 못해 늘 미안했어. 

그런 와중에도 자기는 인내하며 아들 케어하고 남편 뒷바라지해 줬지.

자기의 고마움에 대해서는 일일이 말로 표현할 수가 없지.

조항조 "고맙소" 노래를 내가 불러주고 싶네.

그런데 음치라서…

지난 2016년 11월 소방본부 0000과장 근무 시절 갑자기 뒷머리에 통증이 시작되어 병원에 가서 진단한 바 뇌출혈과 선천성 뇌혈관 기형으로 머리를 열고 큰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뇌 수술은 춘천 0000병원을 거쳐 서울  0000병원에서 받았지요.

머리를 열고 뇌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 말에 불안감 속에 떨고 있었던 자기의 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어. 

대부분 뇌 수술은 반신불수, 편 마비 등을 동반하는 아주 위험한 수술인데 말이야.

이후 퇴원해서 회복하는 기간 동안 아내와 아들에게 무한 고맙고, 장모님이 내 손 잡고 운동을 함께 했었지, 

장모님이 올해 89세, 100수 하시겠지 뭐.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잘 모시자고.

또 집 문턱이 닳도록 위문 와 주신 친척들과 선·후배·동료 소방관들 그리고 지인분들께도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여행 가기 전 이별 인사는 다 못 드리겠지만 일부는 오프라인에서 만나보고 떠날 계획이야.

/     


마지막하나밖에 없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우리 아들에게     


아들아! 아빠 이제 긴 여행 갈 시간 다가왔어.

그동안 아빠가 아들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해서 미안해.

아빠가 겉으로 표현을 잘 못해도 아들 사랑하는 거 알지.

아들에게 미안했던 일들은 앞서 엄마에게 이야기했던 부분이 있으니 읽어 보렴.

우리 아들! 아직 공부하는 학생이지만 하나만 부탁할게.

아빠는 아들을 믿으니까 아빠의 좌우명인 '해불양수'와 '내일은 없다. 왜?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오늘 최선을 다하자.'라는 신념을 늘 생각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2017년 2월 어느 날 00대학에 입학한 아들에게 써준 7장 분량의 아빠 편지가 있어서 읽어 봤는데 좀 뭉클하네.

2장 정도만 이웃님들께 공개해 보려고…

아들! 아빠가 여행 간 다음 아빠 편지 다시 한번 읽어 봐줘. 

아빠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듬뿍 담겨 있다는 거  알 수 있을 거야.

아빠는 전직 소방관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아빠의 삶을 조명하는 인생 책인 수필집을 출간할 수 있게 되었어.

역사에 내 이름 자와 책을 남길 수 있어서  아내와 아들 그리고 도움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해. 

아들! 아빠가 떠난 다음 사람들에게 "우리 아빠는 글 쓰는 삶을 사시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머나먼 여행을 가셨어요."라고 이야기해 주렴.    

그리고 중요한 게 빠졌네. 아빠가 엄마와 함께 이루어 놓은 많지 않은 자산은 살고 있는 집 한 채, 그리고 조그만 임야와 밭 각각 1필지가 있고, 차량 2대 그게 전부네. 아 또 있네. 아빠 연금과 주식. 

아빠 자산 부분은 엄마와 상의해 조치하면 될 것 같고, 아빠가 여행 떠난 다음 아빠의 몸은 깨끗이 불태워 바람에 날려 보내 주든지 아니면 나무 거름으로 사용해도 괜찮은지 모르겠네. 

지구 환경 때문에 불가능하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장례를 치러 주렴.         

/

여보! 당신 퇴직하고 크루즈 여행 가기로 했는데… 

나 혼자 긴 여행을 가기 전에 가능할까 모르겠네. 

크루즈 여행을 함께 못 가더라도 이해해 줘. 

내 의지는 아니었으니까. 

나 떠난 다음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다녀와. 

여보! 아들! 이제 떠날 시간이 된 것 같아.

나의 인생은 

여보와 아들 때문에 행복했고

여보와 아들 때문에 의미가 있었고

여보와 아들 때문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완성되어 왔던 것 같아.

이제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나의 여행을 즐거운 마음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가려고 해.

그곳도 역시 현생과 마찬가지로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곳이겠지 뭐.

그러니 부디 나의 이 여행길을 축하해 주고 축복해 주면 고맙겠어. 

여보! 아들! 그렇게 해 줄 수 있지.

내가 떠났다고 슬퍼하지 않을 거지.

인간은 자연에서 왔고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거 알지    

저는 오늘 쓴 엔딩노트를 생이 다하는 날까지 수정·보완해 가며 청년 기공메자의 인생 후반전이 좀 더 가치 있는 삶이 되도록 오늘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내일은 없다. 왜?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최선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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