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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규관 Mar 10. 2023

이른바 ‘불가능성의 가능성’에 대하여

―김수영 시가 어렵다고?(10)

하이데거는 시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바보다 훨씬 심원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시에 대한 발언은 이런저런 글들에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지만 여기에서는 「형이상학의 극복」의 한 부분만 간략하게 소개해볼까 합니다. 갑자기 하이데거가 호명되는 것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김수영 읽기와는 무관하다면 무관하다고 할 수 있지만, 저는 지금 우리의 시가 어느 방향으로 갈지 약간은 우울하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지 장르로서의 시에 대한 입장에서가 아니라 나날이 깊어가는 근대문명의 병폐에 시가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지, 그것이 의심스럽다는 뜻입니다. 근대문명이 야기한 생태계 위기는 지금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를 옥죄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나 코로나19 같은 바이러스의 창궐도 결국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 일으킨 문제들이지만 세계적으로 질곡에 빠진 민주주의도 저는 결국 생태 위기의 연장선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른바 참여시가 외치는 저항의 목소리들이 천편일률적이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제는 저항과 비판의 언어마저 테크놀로지의 먹잇감이 되어 최근에 회자되는 인공지능에 복무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형이상학의 극복」은 1936년에서 1946년에 걸쳐서 쓴 단문들의 모음인데, 이 글은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압축적인 단상이어서 따라 읽기가 상당히 난해합니다. 대략적으로는 니체에 대한 비판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데요, 26절에서 시작되는 현대 세계, 즉 1, 2차 세계대전에 대한 하이데거 특유의 진단이 인상적입니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는 기술의 발전이 “존재의 궁극적인 떠나감”을 야기했고 그 공허를 메우기 위한 “질서 정립 과정”이 “무장(Rüstung)”에 사로잡히게 했다고 비판합니다. 특히나 인상적인 대목은 정치 지도자에 대한 다중의 비판과 비난은 사태의 진상을 잘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면서 “사실은 지도자들은 존재가 미망에로 이행한 것의 필연적 결과”라고 합니다. 제 주관적인 느낌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이데거 자신에게 평생의 오욕으로 작용한 나치 참여에 대한 자기변호 같기도 하고 자신의 정치적 선택을 배신한(?) 히틀러에 대한 비판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기술의 조작(Machen)에는 문화도 속하는바, 그러한 기술의 조작을 위해서 존재자를 소모(Verbrauch)하는 것이 존재의 떠나감이 남긴 공허함 내에서의 유일한 출구”가 되었다는 하이데거의 발언은 지금 우리의 현실과 상통하는 바가 큽니다.(이상 「형이상학의 극복」, 『강연과 논문』, 116~117, 이학사)     

우리가 살펴볼 대목은 27절과 28절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최근에 ‘첨단’의 시론으로 제시되는 ‘불가능성으로서의 시’에 대해서 무언가를 물을 기반이 형성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지의 법칙은 각각의 사물들에게 부여된 가능한 것의 권역에서 사물들이 출현하고 소멸하도록 하면서 대지를 보존하고 있다. 각각의 사물은 자신에게 할당된 가능성의 영역을 알지 못하면서도 그것에 따른다. 자작나무가 자기의 가능성을 넘어서는 일을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꿀벌은 자기의 가능성 안에서 살고 있다. 기술을 수단으로 하여 도처에서 활개를 치는 의지를 통해서 비로소 대지는 인위적으로 피폐하게 되고 남용되고 변형된다. 그러한 의지는 대지로 하여금 자신에게 가능한 것의 권역을 넘어서도록 강요당하며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 불가능한 것에로까지 나아가게 한다. 기술적인 기도들과 조처들을 통해서 많은 발명과 급속한 혁신이 상당 부분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기술의 성취를 통해서 불가능한 것조차도 가능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같은책, 124)     


사실 이 발언은,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이 우리에게 암암리에 심어놓는 무의식을 겨냥한 말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현대의 우리는 가능성의 테두리를 일종의 제한으로 받아들이며 기술을 통해서 그것을 넘어서고자 욕망하고, 이 욕망이 매우 급진적인 내면이라고 부지불식간에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진단에 다른 측면의 반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가능성의 테두리를 ‘가두리’로 삼아 인간과 사물을 파편화시키고, 파편화된 자아와 부품화된 사물을 상품의 재료나 요소로 삼는 자본의 기도가 깊숙한 데서 획책되고 있기 때문이죠. 또 근대국가의 책무 또한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자본의 기도에 복무하면서 우리의 삶과 생명을 절편화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가능성이라는 제한을 넘어 불가능성이라는 영역으로 나아가고자 하며, 이것이 또한 정치적, 문화적 진보라 불리기도 합니다. 만일 가능성이 국가와 자본이 쳐놓은 가두리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가능성을 넘어서는 모험을 행해야 하는 것도 마땅하죠.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적 사태는 우리의 관념대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자본과 국가의 가두리를 넘어서는 모험과 상상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대지의 법칙”을 위반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며 언제부터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대지의 법칙”을 넘어서는 일이 ‘급진(radical)’으로 용인되어 온 것도 사실입니다.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기술의 조작에는 문화”도 속합니다.      


경제와 정치의 영역에서 진보가 문화의 영역에서는 퇴행을, 특히나 “대지의 법칙”을 기준으로 해서는 심각한 파괴를 낳을 수도 있으며, 지난 경험을 돌아보았을 때 이는 사실에 가깝습니다. 즉 “기술의 조작”이 경제적 혁신만을 낳은 것이 아니라 그 혁신의 부산물을 불가피하게 이용해야 하는 생활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가 “기술의 조작”에 참여하기도 하죠.      


만일 현실적 사태가 이렇게 진행되고 있다면 우리의 상상력과 언어가 “기술의 조작”에서 자유롭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시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언술에, 혹 인간 존재의 한계를 근원적으로 무시하거나 회피하는 문화주의가 배어 있는 측면은 없는 걸까요?       


하이데거의 인용된 말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자신에게 할당된 가능성의 영역을 알지 못하면서도 그것에 따른다”는 것일 텐데요, 시가 꿈꾸는 불가능성의 영역도 “자신에게 할당된 가능성의 영역을 알지 못하면서”에 한정돼야 마땅합니다. 다시 말하면, 시가 꿈꾸는 불가능성의 영역은 우리에게 할당된 “가능성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겸허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시가 꿈꾸는 불가능성의 영역도 “눈에 보이지 않는 대지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말을 굳이 생태주의에 묶어둘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우리의 삶과 언어 자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대지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지’가 가진 깊이와 넓이는 우리의 인식 능력을 초월합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 대지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는 것은 인간 존재에게 억압이 되기는커녕 무한한 상상을 허용하면서 겸허를 동시에 요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지를 물리적으로 ‘땅’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말하는 세계의 모든 것을 “지탱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합니다. 하이데거마저 맥락에 따라 그렇게 사용하기도 하거니와 인용문의 다음 단락에서 “지구를 단지 이용하는 것과 지구의 축복을 수용”하는 것의 차이를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제한 또는 한계야말로 우리가 항용 말하는 자아의 생성 기제는 아닐까요? 이것은 하이데거가 『니체 1』에서 한 말이기도 한데요, 인간은 다른 사물이 강요하는 제한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자신이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선’을 의식하며 그것의 누적이 무의식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을 다시 문화적 규범과 도덕적 억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근대 정신분석학의 주제가 되었는데, 이렇듯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그 심도(深到)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배제를 극복한다면서 혹 갖게 된 “대지의 법칙”의 망각으로 인해 우리의 언어를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상황에서 멀어지게 할 수도 있는 역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역설이 시에서도 벌어지지 말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데요, 이는 앞으로 더욱 기승을 부릴 “기술의 조작” 시대에 시의 책무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현대의 기술이 근대의 “완성된 형이상학이라는 개념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면 “기술의 조작” 시대의 시의 책무는 근대의 심부(深部)에 대한 응전이라는 막중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지구의 황폐화는 의욕된 과정으로서 그러나 그 본질에 있어서 인식되지 못하고, 또한 인식될 수도 없는 과정으로서, 진리의 본질이 확실성으로 제한되어버리는 시대에 시작”됩니다.(같은책, 126)     

그러나 문제의 해결 또는 근본적인 변화는 “단순한 행위”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능할까요? 여기에서 다시 시의 문제가 떠오릅니다.       


장래를 지시하는 인도 없이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존재사건이 자신을 밝히지 않는다면, 존재사건이 인간존재를 부르고, 필요로 하면서 인간을 눈뜨게 하지(er-äugnet) 않는다면,  시야를 틔우지(er-blickt) 않는다면, 그래서 [인간] 하여금 사유하고 시를 지으면서 집을 짓는 길에 들어서도록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인도가 [우리에게] 가깝게 다가오겠는가?(같은 , 126)     


하이데거의 결론은 그의 문제의식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시의 역할을 명시했다는 점이며 이는 하이데거를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살펴보자는 취지에 부합됩니다. 사실 두려운 것은 하이데거의 시에 대한 입장의 수용 여부가 아니라 나날이 확산되고 있는 시인들의 무기력과 냉소주의일 겁니다.      


어쩌면 시에 대한 이런 논의가 불필요한 압박으로 느껴질 수도 있고 시는 본래 속성이 무용한 것이라는 반론도 있을 수 있지만, 시의 무용성 운운은 함부로 뱉을 말이 아닙니다. 시가 무용하다는 것은 모든 것을 도구화, 부품화하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외부에서 시가 성립한다는 저항 기제로서 그렇다는 것이지 패배주의나 순응주의를 은폐하기 위한 커튼이 아닙니다.

     

하이데거는 「횔덜린과 시의 본질」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시는 터-있음이 [살아가면서] 동반하는 그의 한갓된 장식품이 아니요, 일시적인 열광도 아니며, 심지어 한갓된 흥분이나 담소도 아니다. 시는 역사를 지탱해주는 바탕이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한갓된 문화현상이 아닐 뿐더러 더 나아가 ‘문화정신’의 단순한 ‘표현’도 아니다.”      


사실 이러한 시에 대한 하이데거의 발언들은 김수영의 산문에서 변용되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제가 여기서 짧지 않게 하이데거를 소개하는 것은 시가 “열광”이나 “흥분”이나 “담소”에 빠지지 않으면서, 그러니까 우리가 처한 위기 상황에 대처한다며 도리어 부채질을 하는 딜레마에 빠지지 않고 위기를 극복하는 일에 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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