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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규관 Mar 17. 2023

아래로 떨어지는 고독

―김수영 시가 어렵다고?(11)

폭포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폭포」의 의미 흐름은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① 폭포가 무서움도 없이 주야와 계절을 가리지 떨어진다, ② 그러한 폭포는 고매한 정신과 같다, ③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그 곧은 소리는 다른 소리를 부른다, ④ 곧은 소리는 “나타(懶惰)와 안정을” 뒤집는다.


1연과 2연은 각각 ①과 ②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2연 마지막 행의 “고매한 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3연과 4연에 부연을 요청합니다. 즉 ③이 불려 나오죠. 5연은 대체 “곧은 소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르게 변주합니다. ④에 해당하죠. 「폭포」의 내용은 이것입니다만, 여기서부터는 언어의 뒤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는지 세심한 읽기가 필요합니다.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지는 “폭포”는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면서 방향도 의미도 없이 떨어지기만 합니다. 거기다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떨어집니다. 여기까지는 김수영의 폭포에 대한 시적 재현이기도 하고 자신의 감성을 부여한 표현들이 눈에 띕니다. 


일단 두려움이 없고, 무규정적이고, 무방향이고, 무의미이죠. 이게 지금 김수영이 바라보고 있는 폭포입니다. 그렇다면 이 폭포는 무정부적이고 혼돈의 상태인가요?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만, 여기까지 읽으면서 느껴지는 어떤 ‘힘’이 있지 않나요? 사실 ‘힘’은 인간의 주관적인 의지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 자연의 운동과의 신체 작용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에서 느끼는 힘은, 파워(power)나 포스(force)가 아니지요. 제가 영어를 잘 모르지만 적당한 번역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에서 우리가 느끼는 힘은 기(氣)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이것에 대해 말하자면 별도의 글이 필요할 것인데요, 저는 시에도 만일 기가 있다면 그것은 시인이 경험한 구체적 사물/사건의 기가 시인에게 건너오고, 그것을 시인이 죽이지 않고 살려서 언어화했을 때 가능하다고 추정합니다. 다시 또 소급해 가자면 사물의 형태나 운동마저 기의 변화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을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온통 기의 운동과 정지로 이루어져 있게 됩니다. 


따라서 ‘무(無)’는 실제로 없는 것입니다. ‘허(虛)’도 마찬가지가 되는데, 무와 허는 단지 논리적으로 또는 기에 대해 상대적으로 말해지는 것일 뿐이죠. 하지만 기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냄새도 안 납니다. 인식되지도 않죠. 그런데 우리는 이 기를 일상에서도 충분히 느끼며 삽니다. 가장 흔히 하는 말로 분위기가 있잖아요? 


예를 들면, 오늘 이 강의실의 분위기, 뭔지 모르겠는데 느껴지는 이상한 분위기 같은 것도 결국 기의 운동 때문인데 이 강의실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누군가 아주 심각한 걱정이 있거나 우환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은 아주 기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에도 강도가 있고 깊이가 있어서 분위기에 영향을 끼치는 정도를 나타낼 수 있는데, 이것을 누군가가 받아서 증폭시키거나 경감시킬 수도 있을 겁니다. 어디까지나 하나의 예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이것은 우리의 오관이 분명하게 느끼는 ‘경험적 사실’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기의 운동이라는 것이 과학적이지 못하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도 경험을 무시한다는 측면에서 비과학적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청중 방귀 같은 것이네요.    

 

재밌는 비유입니다.


쓸데없는 말이 길었습니다. 시에서 느끼는 힘, 생동감, 생기 같은 것을 말하다가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떨어지는 폭포에서 힘을 느낀다면 그것은 폭포를 형성한 힘이 넘쳐서 우리에게, 이 작품에 즉하자면 시의 화자에게 건너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힘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어떤 힘을 갖춰야 합니다. 즉 그 힘을 받아 안을 수 있으려면 폭포를 느끼는 주체에게 그에 걸맞는 힘이 있어야 하죠. 


그 힘을 느끼지 못하고, 단지, 아 시원하다! 멋있다! 이런 경탄에 머물고 만다면 폭포의 힘은 건너오다가 말아버립니다. 폭포에서 힘이 건너오지 않으면 우리는 폭포를 감각하는 수준에서 머무는데, 이 감각도 결국 자신이 갖고 있는 힘에 의해 차이가 납니다. 자신이 폭포의 힘에 걸맞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폭포의 힘을 온전히 받아안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폭포를 사유하게도 합니다. 시는 사유라는 말도 있는데, 결국 자신이 가진 힘, 즉 존재 역량이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김수영이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고 할 때, 그것은 김수영 자신의 힘을 표현한 것입니다. 지금 “고매한 정신”은 아래로 떨어지고 있지 위로 올라가려는 욕망이 아닙니다. 그리고 3연에서 다시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고 변주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매한 정신”과 “곧은 소리”는 어떤 관계일까요? 그런데 그 사이에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이 있습니다. 이게 어떤 상태인지 가만히 상상을 해보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에 “고매한 정신”은 어떤 것을 느낄까요?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에서 어떤 고독한 정적이 상상되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시의 화자 가까이에 있지 않은 시간, 그 어둠 속에서 폭포는 “쉴 사이 없이” 떨어지면서 소리를 내겠죠. 오롯이 폭포 소리만 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휩싸인 시간에 폭포 소리는 그래서 “곧은 소리”입니다. 또 오롯이 폭포 소리만 존재하기에 “곧은 소리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연이어 나는 소리는 또 “곧은 소리”입니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사실 시간적인 의미의 부사 ‘연이어’도 무의미합니다. 그냥 통째로 그치지 않고 나는 “소리”면 충분하죠. 그 사이에 아무것도 낄 수가 없습니다.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릅니다. 그런데 그 “곧은 소리”는 “나타(懶惰)와 안정을 뒤집어” 놓습니다. “나타(懶惰)와 안정을 뒤집어” 놓는 것은 또 “고매한 정신”의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고매한 정신”이 내는 “곧은 소리”의 연속은 지금은 시의 화자만의 것입니다. 왜냐면, 그 “소리”는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나타나기 때문이죠. 거리에서도, 집에서도, 신문사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그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로지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들리는 소리입니다. 


제가 이 시를 고독의 시라 부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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