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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규관 Jan 27. 2023

김수영 시가 어렵다고?(3)

-꽃은 ‘언제’ 열매의 상부에 피는가 (1)


(「공자의 생활난」에 대한  해석은 60 가까이 됩니다. 줄여서 2회에 걸쳐 올려보겠습니다.)      


이제 「공자의 생활난」을 읽어보도록 하죠. 지금부터 해석은 제가 『리얼리스트 김수영』(한티재, 2018)에서 했던 해석과 크게 달라진 입장은 아니지만, 1연 1행에 대해서는 그때보다 과감한 해석을 시도해볼까 합니다.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작란(作亂)을 한다     


나는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叛亂性)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 「공자의 생활난」 전문    

 

이 작품에 대해서 김수영은 훗날에 쓴 산문 「연극하다가 시로 전향—나의 처녀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수록된 「아메리카 타임지」와 「공자의 생활난」은 이 사화집에 수록하기 위해서 급작스럽게 조제남조(粗製濫造)한 히야까시 같은 작품”이라고 말입니다. ‘조제남조’는 조악한 작품을 남용하듯 함부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생각하니  별로 맘에 안 들었나 봅니다. 대체로 시인들은 오래 전 자기 작품에 못 참아 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것도 감안해서 읽으실 필요가 있습니다.


「공자의 생활난」이 그의 자조대로 “히야까시 같은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유념해야 할 김수영 정신의 기초가 여기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진짜 “조제남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설령 “조제남조”라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깊은 곳을 작품에 드러내지 않았나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먼저 1연인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너는 줄넘기 작란(作亂)을 한다”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일단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열매 다음에 꽃이 피는 식물도 있는지, 그것부터가 오리무중입니다. 호박꽃이 호박 위에 피기는 하지만 그것은 꽃이 먼저 피고 열매인 호박이 꽃 아래에 열리는 경우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는 김수영의 관념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면, 김수영이 경험주의자에 가까운 점을 고려한다면, 어떤 독서 체험에서 얻은 이미지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감각 불가능한 관념인 것은 사실이죠.


즉 1연부터 현실의 묘사나 재현이 아니라 단도직입적으로 관념의 세계를 펼쳐놓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기 관념의 세계를 제시한 다음에 그때가 되면 ‘즐겁게’ “줄넘기 작란(作亂)을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즐겁게’라고 덧붙인 것은, 1연에서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에서 우울이나 슬픈 같은 부정적 정동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는 김수영이 바라고 바라는 세계, “텐더포인트”(「연극하다가 시로 전향—나의 처녀작」)를 넘어선 꿈 같은 세계에 대한 관념적 표현일까요?       


실제로 1950년에 발표한 「토끼」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잠시 그는 별과 또 하나의 것을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 김수영이 꿈꾸는 세계를 암시하고 의미하는 사물 또는 이미지는 다른 작품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것도 또한 시를 읽어가면서 제시해보겠습니다. 「토끼」에서 등장하는 “별과 또 하나의 것”은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의 감각적 등가물입니다. “별”은 동서양의 시인들 모두에게서 자주 등장하죠, 어쩌면 김수영은 연극으로는 ‘꿈꾸기’가 쉽지 않아서 시를 쓰기 시작했는지 모릅니다. 연극이라는 예술 장르가 꿈꾸기에 얼마나 적합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런 꿈이 실현될 때 즐겁게 “줄넘기 작란(作亂)을”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진술하는 게 2연의 내용입니다. 보세요. 시적 화자도 “나는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발산한 형상”과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는 이미지상으로 서로 조응하지 않나요? 둘 다 제한된 영토를 초월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느끼게 해주지 않나요? ‘열매의 상부에 핀 꽃’ 자체가 “발산한 형상”의 감각적 이미지 같지 않나요? 하지만 ‘열매의 상부에 핀 꽃’은 우리가 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관념의 세계를 펼쳐놓다’고 말한 것입니다.      


초월의 세계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세계이니 감각할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오직 언어로만 존재하지요. 그런데 언어로만 존재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저는 시가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언어로 구성되지만 리듬을 통해서 언어가 미처 끌고 나오지 못한 세계를 희미하게나마 예시합니다. 아니, 언어와 리듬과 침묵과 암시를 통해 현실에 없는 세계를 소묘합니다. 「공자의 생활난」이 갖는 난해성도 여기에 있을 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죠.      


김수영은 그런 다음 “그것은 작전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고 말합니다. 현실의 조건이 “발산한 형상”과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거죠. 정말 군사작전처럼 어렵고도 어렵습니다. 군사작전의 실패는 참담한 피해를 야기합니다. 죽음을 부르기도 하죠. 더군다나 ‘열매의 상부에 핀 꽃’은 관념을 표현하는 이미지로 작용할 수 있지만, 문제는 “때”를 김수영이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감각적 상관물을 넘어서 그것이 태어나는 “때”, 시간. “때”는 실체화된 사물이 될 수 없고 다만 사건으로 솟아오를 뿐입니다. 특정한 사건이 감지되면 우리는 ‘때’가 왔다고 하죠. 사건도 사물처럼 시간 속에 존재하지만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건이 남긴 정신적, 사회적, 문화적 흔적들은 사물과 다른 의미를 우리에게 남깁니다. 그런데 꽃도 영원히 꽃으로 남아 있지 못합니다. 영원한 사물은 없죠. 사물이든 사건이든 ‘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동시에 ‘때’를 표현합니다. 아니 ‘때’를 만들기도 하죠. 이렇게 시간과 사건/사물은 서로 작용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열매는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 지속이 가능하며 다시 지속적 시간을 내장한 ‘씨’를 간직하지만, 꽃의 “발산”은 살아 있는 어느 순간에만 허락됩니다. 그러므로 이 “때”가 도래했을 때에 ‘즐겁게’ 하는 “줄넘기 작란(作亂)”은 유한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행위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시적인 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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