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가 어렵다고?(6)
「달나라의 장난」은 김수영이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고 부산으로 와서 《자유세계》의 편집장인 박연희의 청탁으로 쓴 전쟁 이후의 첫 작품인데, 산문 「나는 이렇게 석방되었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12시 20분 천안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야 할 것을 다음 차로 미루고 나는 온천 거리를 자유의 몸으로 지향(指向) 없이 걸어 다니었다.” 가둬져 있다가 바깥으로 나오게 되면 사실 어디로 가야 할지 한동안 막막해지기는 합니다. “지향(指向) 없이 걸어 다니었다”는 실제 그런 심리상태 때문이겠지만 어쩐지 아주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지향 없음’은 동시에 다른 의미도 갖지요.
팽이가 돈다
어린아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번 팽이를 돌려 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 안에서 쫓겨 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 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 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달나라의 장난」은 “팽이가 돈다”로 시작합니다. 시를 읽어가다 보면 알겠지만, 팽이는 지향을 갖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서 도는 존재이며 작품에 묘사되는 “나”의 상황과 조응합니다.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린 상태입니다. 도리어 “또 한번 팽이를 돌려 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입니다.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가 있는 것인데 아이가 돌리는 팽이에 취해 있는 것이죠.
그러면 시의 화자가 도는 팽이 때문에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은 것일까요? 아무리 되풀이 읽어도 그런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도회 안에서 쫓겨 다니는 듯이 사는”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과는 달리 “살림을 사는 아해들도 아름다웁듯이/노는 아해도 아름다워” 보이고 “누구 집을 가 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포로수용소에 나와 가족과 헤어진 채 부산에 팽개쳐진 김수영의 실제 생활을 유추하게 합니다.
“나”의 처지와 다른 이들의 모습이 비교되면서 시의 화자가 갖는 정서는, 대체 어떤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거기에다 의용군으로 끌려가 죽을 고비를 넘기며 탈출했더니 포로 취급을 받고 갖은 고생을 한 김수영의 경우라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들을 “모두 다 내던지고”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보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마치 별세계같이” 보입니다. 김수영의 처지에서는 당연히 “나”와는 다른 생활들이 “별세계” 같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팽이가 돈다”를 두 번 반복합니다. 시에서 이런 단순반복은 두 가지 정서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상승과 고양을 표현할 수도 있고요, 다른 하나는 현재 상태에 머물러 버리는 하강과 침잠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느낄 수 있는 화자의 정서는 후자입니다.
이 작품의 특징은 전반부의 마지막도 “팽이가 돈다”를 두 번 반복하고 후반부의 마지막도 동일하게 “팽이가 돈다”를 두 번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연 구분도 없이 딱 절반으로 등분됩니다. 그런데 전반부에서는 대체로 화자의 상황이 적시됩니다. 단순한 상황 묘사인 것 같은데 읽는 우리로서는 그렇게 밝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정서는 후반부에서 직접적으로 표출되면서 그 정서와 ‘싸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전반부에서는 시의 화자의 상태와 어떤 정황을 펼쳐 보여주다가 “팽이가 돈다”를 두 번 반복하면서 후반부로 넘어가는 구조를 갖습니다. 분명히 “누구 집을 가 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바쁘지도 않으니/마치 별세계같이 보인다”고 하면서 곧바로 “팽이가 돈다”를 두 번 반복함으로써 “별세계”를 ‘도는 팽이’에 얹습니다. 그렇죠? 작품의 진행상 여기가 클라이맥스는 아니지만, 이 점을 이해하고 넘어가야 후반부의 뜻이 확실하게 밝혀지며 그래야만 이 작품에 대한 온갖 오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됩니다.
어릴 때 팽이를 돌려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팽이가 돌 때 돌지 않을 때의 팽이가 갖는 무늬나 질감과는 다른 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것이 김수영은 “달나라의 장난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래 보지 못했다고 하지요. 여기서 “달나의 장난”은 팽이가 돌면서 내는 모습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면서, 김수영이 말하고자는 하는 사실에 대한 환유이기도 합니다.
“오래 보지 못한”은 단순하게 시간적으로 먼 과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버린 지 오랜’ 또는 ‘지금-여기와는 구체적인 관계가 없는’이라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표현은 뒤에 다시 나옵니다. 그런데 팽이가 돌면서 연출하는 “달나라의 장난”이 “나를 울린다”고 합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고 분명하게 나와 있죠? 보다 더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팽이가 돌면서 만들어내는 “달나라의 장난” 때문이라기보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설움이 “달나라의 장난”과 대비돼 순간 북받쳐 오릅니다.
그런데 그다음에서 우리는 이 작품의 고갱이를 만나게 되고 어떤 반전을 느끼게 됩니다.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과 동떨어진 “별세계”를 알게 되고 그것을 도는 팽이가 보여주는 “달나라의 장난”과 같다고 울던 “나”가 돌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자각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자면,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은 겉뜻 그대로 미스터리(mystery)하다는 게 아닙니다. 도리어 ‘기가 막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전쟁을 통해 겪은 김수영 자신의 삶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포로수용소에서 간신히 살아 나와 보니 “부실한 처”(「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는 다른 남자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개인의 판단을 넘어서는 역사적 사건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과 그 사람의 판단을 원망하는 것은 너무도 손쉬운 일입니다. 자신의 불행을 그 사람에게 떠넘기게 되면 일시적인 심리적 분풀이는 가능하죠. 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런 원망으로 되돌릴 수도 없고, 자신의 상처를 근본적으로 치유하지도 못합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겪은 과거의 일은 그 과거를 비난하고 미워한다고 해서 우리의 현재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병이 더 깊어질 뿐이죠.(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