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이 필요한 우리들에게
며칠 전 콩자씨와 더현대 대구점에 방문했다.
작년 중순 즈음, 현대 백화점에서 ‘더현대’로 리뉴얼됐는데, 이름부터 그렇듯 분위기도 확 바뀌었다. 보통 백화점에 간다면 쇼핑 갔겠구나 싶겠지만, 이젠 정말 그 공간 자체를 즐기러 가도 될 것만 같았다.
명품 매장이 줄지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1층에 들어서니 코를 찌르는 화장품 냄새 덕에 멀미가 나는 듯했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 층만 올라서니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에스컬레이터 귀퉁이, 기타리스트님의 연주가 라이브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옛 현대 백화점을 생각하고 들어온 내게는, 다소 신선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덕분에 좋은 음악을 배경 삼아 구경할 수 있었고, 때마침 진행 중이던 작은 전시회도 편히 즐길 수 있었다. 대부분 정말 고가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는데, 들르기 편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어 누구나 자연스럽게 둘러보며 대화 나누고 있었다.
그저 발걸음을 조금씩 옮겨다니기만 했을 뿐인데 계속해서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밝았다가 어두웠다가, 힙했다가 차분했다가. 시장 같은 북적함을 느끼다가도 조용히 모여 공연을 듣기도 하고, 다양함을 한 곳에 다 모아둔 듯했다.
지하로 내려가보니 많은 음식점들이 입점해 있었다. 요즘 젊은 층에 인기 있을 법한 메뉴부터 온 가족이 식사해도 될 것 같은 식당까지, 스펙트럼 넓은 매장들 덕에 보는 재미마저 있었다.
베이글 같은 베이커리류도 상당했는데, 메뉴들이 하나 같이 모두 특별해, 허기진 우리의 침샘이 마구 자극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홀리듯 몇 개를 고르게 되었고, 우연히 감자의 인생 도넛을 만나게 되었다!
이탈리아식 도넛이라고 적힌 Vezzly사의 도넛이었는데, 레몬맛 필링이 들어가 상큼하면서 달콤했다. 백화점에서 인생 도넛을 만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더욱 만족스러운 디저트 타임이 된 듯했다.
기타 연주를 시작으로 전시회를 거쳐 인생 도넛에 이르기까지, 한 건물에서 모두 일어난 일이다. 다양하다 못해 온갖 트렌드를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듯하여, 머무는 재미가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이런 다양함을 머금은 곳을 일컬어
“복합문화공간”이라 부르기로 했나 보다.
들여다보기
인생 도넛을 뒤로, 이곳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9층에 올라서니 또 멋진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카페로 보이는 넓은 공간에,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는 전시공간, 더 자연스럽게 이어진 야외 공간은 우리의 문화가 집약돼 있는 듯했다. 하이메 아욘이라는 스페인 디자이너가 구성한 공간인데, 전체 공간을 통틀어 “더포럼”이라고 일컬었다.
카페에 줄지은 여러 분위기의 테이블과 공간들 전체가 예술(?)스러웠다. 그곳에 앉아 대화 나누고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까지 포함해, 공간과 인간이 아우르는 모든 분위기까지 예술에 포함된 듯했다.
특히 더포럼 중앙에 있는 콜로세움이 눈에 띄었는데, 야외•카페•전시공간 모든 곳으로 이동하기 좋은 위치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이를 보며 로마에 있는 찐 콜로세움이 떠오른 것이다!
로마의 건국 초기, 로물루스 로마 초대 왕의 가장 큰 고민은 현저히 부족한 인구수였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로마를 찾을 수 있도록 공간과 시설을 구상하는 데에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고 한다.
로마 지형 특성상 언덕이 많았기에 언덕과 언덕 사이 공간을 잘 활용하고자 했는데, 그렇게 팔라티누스 언덕과 그 옆 카피톨리누스 언덕이 만나는 곳에 습지를 흙으로 메꾸어 시장이란 뜻의 ‘포룸 Forum'을 건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주변 언덕 주민들은 포룸으로 내려와 교역을 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시장도 형성되어 많은 이가 모이게 돼 발전하며 공공건물도 들어서게 되었다. 이곳이 그 유명한 ‘포룸 로마눔’이며, 이를테면 최초의 복합문화 공간이 생긴 것이다.
로마 왕정 시기에 만들어진 콜로세움과 같은 건물들은 도보로 이동 가능할 만큼 가까이 모여있다. 포룸 로마눔의 시끌벅적함과 대전차 경기장의 함성, 줄지은 신전에서 울려 퍼진 기도 소리는 로마의 역동적인 모습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볼 수 없게 된 모습이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로마에 모이고 있고, 그 덕에 로마는 여전히 활력을 유지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하이메 야욘도 이런 로마의 위대한 공간을 거울삼아 콜로세움을 세우고 포럼이라는 이름을 빌려, 이곳 9층에 모든 이가 오가기 좋을 아름다운 공간으로 채워 넣은 것이지 않을까.
참여하기
과거 문화 집회 시설의 역할을 수행한 콜로세움의 이름에 걸맞게, 더포럼의 콜로세움 또한 현대 우리의 문화를 꽃피우고 있는 듯했다.
개방적인 느낌이 들어 공간감이 없을 것 같았지만, 안으로 들어서니 다른 음악이 흘러나와 새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곳에서는 아이들과 젊은 부모님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모두들 풍선 인형을 만들어주는 키다리 아저씨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키다리 아저씨가 풍선을 만들어주는 모습은 우리의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담당자분들께서 정말 기획에 신경을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이런 참여형 컨텐츠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즐겁기만 한 모습이었다.
기획의 의도가 맞는지 잘 모르겠지만, 1층에 있는 메인 포토스팟(?)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폭포를 표현한 민트색의 대형 풍선 조형물인데, 많은 이들이 SNS에 인증샷을 남기며 이곳을 주목받게 해주기도 했다.
풍선 특유의 생동감에 천장을 뚫을 듯한 높이로 뻗어있는 민트색 폭포 줄기는, 이곳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듯했다. 그런 이미지를 생동감이 담긴 풍선으로 우리들에게 돌려주며 더현대를 온전히 선물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우리의 추억이 담긴 키다리 아저씨와, 과거를 정통한 콜로세움에서 말이다.
즐기기
야외로 나가니 아주 조금은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조형물들과 초록초록 우거진 수풀들로 작은 정원이 조성돼 있었다. 유리문을 열고 나갔을 뿐인데, 안에서는 들리지 않던 앰프를 타고 흘러나오는 여러 악기들 소리가 정원을 가득 채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창작물의 의미는 잘 몰랐지만, 정원을 거닐고 공연을 보면서 내가 보고 듣는 예술에 속해있음을 느꼈다. 텅 빈 정원은 그저 포토존에서 그치겠지만 사람이 모여 음악을 즐긴다면 정원에도 또 다른 활력이 더해질 테니 말이다.
우리가 방문했던 날엔 콩자씨께서 좋아하는 제이레빗 가수님들의 공연이 있던 날이었다. 평소 함께 듣던 노래를 이렇게나 예쁜 공간에서, 그것도 제이레빗 선생님들의 가까이에서 듣게 되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음악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감동과 추억은 이루 말하기 어렵지 않을까. 이젠 제이레빗 선생님들의 노래만 들어도 예술품에 퐁당 들어갔던 그날이 떠오르니 말이다.
한 층에서만 해도 수많은 추억들이 생겨나니, 이제는 백화점에서도 종일 데이트를 해도 될 그런 시대가 왔음을 새삼 느꼈다.
삶의 수준이 높아지며, 시람이 모이는 곳에는 예술 없인 구색도 못 갖추는 시대가 된 것은 아닐까. 자연스럽게 우리의 주위를 아름다움으로 채워지고 있는 모습들은, 지금이 얼마나 즐길 거리가 많은지 가늠하게 해 준다.
백화점에 들어가 기타 연주를 듣고 전시회 구경을 하며 인생 도넛이 될 만큼 퀄리티 있는 음식을 먹고, 자연히 조성된 한 층 전체의 예술을 거닐며 역사를 느끼고 예술에 참여했다. 또 잡초 하나 나지 않았을 건물 옥상 공간에서 푸른 초목을 즐기며 문화를 선도하는 가수들의 공연도 들었다.
이 모든 일이 한 건물에서 생긴 일이라니, 이 자체로도 아름답지 않은가!
복합문화공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다가와준 이 감사한 문화덩어리는, 훗날 문화를 선도했던 예술의 공간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격 없이 다가와주고 있는 예술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맞이할 때임을 새삼 느낀다.
옛 성물에나 있었을, 옛 귀족들의 창고에나 있었을 고귀한 예술들이 지금은 민중을 넘어 우리 삶에 깊숙이 다가와 함께 머물고 있다.
예술도 이렇게 노력하는 마당에 우리라고 손 놓고 있을쏘냐! 문화를 만들긴 어렵겠지만 즐기는 것 정도는 해볼 만하지 않을까.
소중한 사람들과 추억 하나 만들러 한 번 방문해 보자. 이 자체로 문화에 보답하는 일일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