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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May 03. 2023

파리대왕_윌리엄 골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서평 쓰기 9

울지 않는 잭  

『파리대왕』 (Lord of the flies)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민음사 2010년)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전쟁 속 인간은 악랄하다. 무기가 발전하듯 인간의 악함도 계승되어 왔다. 진화된 악은 창작물의 흔한 소재이다. 『파리대왕』은 신선했다. 통상 어린이는 전쟁의 피해자로 인식된다. 이 책의 아이는 다르다. 광기에 휩싸인 악인이 어리기에 인간 근원의 악을 보다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연령을 제한함으로 사회화된 악이 아닌, 태생부터 존재해 온 인간의 폭력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태평양의 섬. 아무도 살지 않는 그곳에 핵전쟁을 피해 영국에서 떠난 비행기가 추락했다. 어른은 모두 죽었다. 5~12세의 20여 명의 아이만 살아남았다. 섬은 생존을 위한 기본 조건을 갖추고 있다. 풍성한 과일과 멧돼지들, 담수화된 물웅덩이까지.      


아이들은 두 그룹으로 나뉜다. 5~7세의 꼬마그룹과 12세를 전후한 소년 그룹. 꼬마 그룹은 수영과 모래로 놀고 과일을 따먹는 등 대체로 태평하게 지낸다. 이야기의 핵심 축은 소년 그룹이 만들어간다. 핵심 인물은 이렇다. 구조를 위해 의견을 모으고 질서를 만들어가는 랠프, 해박한 지식을 상징하는 안경 쓴 돼지, 다부지고 용맹하나 독재자 같은 잭, 모두가 두려워하는 짐승의 실체를 찾아 떠나는 묘한 느낌의 사이먼.     


골딩은 『파리대왕』의 주제를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사회 결함의 근원을 찾아내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저자는 인물뿐만 아니라 이야기 속 다양한 사물들에 상징성을 부여하고 대립 구도를 만든다. 랠프 쪽 상징물은 ‘봉화’와 ‘소라’이다. ‘봉화’는 구조를 위한 지성적 행동, ‘소라’는 발언권, 즉 회의와 질서를 의미한다. 잭은 생존을 위해 ‘사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사냥을 위해 얼굴에 ‘가면(색칠한 얼굴)’을 쓴다. 처음엔 봉화를 지키는 무리 대 사냥하는 무리로 나뉘어 평화를 도모한다. 그러다 잭의 실수로 봉화를 꺼트리게 되고 갈등이 심화된다.      


잭의 무리는 점점 잔인해진다. 그들의 폭력성이 가장 무섭게 표출되는 장면은 피를 튀기며 암퇘지를 잡던 살육의 현장이 아니었다. 사냥에 성공한 아이들이 흥겨워 저들끼리 장난치던 순간이다.      

로버트가 랠프에게다 멧돼지인 양 으르렁거렸다. 랠프도 장난을 받아 로버트를 찌르는 시늉을 해서 웃었다. 곧 그들은 덤벼드는 시늉을 하는 로버트를 마구 찌르는 체하였다. 잭이 소리쳤다. ‘에워싸!’ (중략) 로버트는 공포에 질린 시늉을 하며 비명을 지르다가 나중엔 정말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중략) 잭은 그의 머리채를 쥐고 창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중략) 랠프도 가까이 다가서려고 승강일 하고 있었다. 갈색의 연약한 살점을 한 줌 손에 쥐고 싶었다. (중략) 겁에 질린 로버트가 흐느껴 우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중략) ‘참 재미있는 놀이였어’. ‘그저 놀이였어’ 랠프는 불안한 어조였다. (p.170~171)


저들의 모습 중 가장 무서운 것은 ‘그저 놀이였어.’라는 합리화다. 한 아이는 한술 더 떠 ‘북소리에 맞추어 장단을 맞췄어야 한다.’고 제안하기에 이른다. 이 장면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오랜 기간 교사였던 골딩의 이력 때문이다. 골딩은 장난이라는 변명아래 폭력을 놀이 삼던 아이들을 본 것일까? 그럴 것이다. 연일 보도되는 학교 폭력의 가해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그저 장난이었어요.’ 골딩은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의 내면을 정확히 바라보고 증언한다.       


사이먼이 ‘하늘에서 내려온 짐승’의 실체를 발견하며 소설은 극을 향해 달려간다. 잭이 그 ‘짐승’을 달래려는 요량으로 창에 꽂아놓은 돼지 머리에 파리 떼가 우글거린다. 그것이 바로 ‘파리대왕’, ‘파리대왕’은 말한다. “나는 네 속에 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그곳에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망치게 할 것이다.” ‘파리대왕’의 예언은 현실이 된다. 사이먼은 ‘짐승’이 사실은 낙하산을 탄 시체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진실을 전하지 못하고 광기에 휩싸인 아이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한다.       


북은 없지만, 맥박 소리가 북을 대신했다. 짐승을 죽이던 아이들은 자신이 짐승이 되어 - 짐승의 말굽 모양으로 대열을 만들어 - 사이먼을 이빨과 손톱으로 물어뜯고 할퀴어 죽인다. 랠프와 돼지도 합세했다. 폭풍의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랠프와 돼지는 변명을 늘어놓는다. ‘우리는 겁에 질려 있었어.’ ‘그건 우연한 사고였어.’ ‘우린 바깥쪽에 있었어. 아무 짓도 안 했어.’ 잭의 무리는 살인과 광기의 힘을 등에 업고 더 악랄해진다. 끝까지 이성적으로 대화하려는 돼지를 살해하고 랠프마저 죽이려 든다. 죽음의 코앞에서 해군 장교에게 구조된 랠프.


 잭의 무리를 본 해군 장교는 말한다.

‘재미있는 놀이를 했군.’ ‘영국의 소년들이라면 더 좋은 광경을 보여줄 수가 있었을 텐데’     


해군 장교의 말에 아이들은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몸을 비틀며 슬픔의 발작을 하며 운다. 아이들의 눈물에는 윌리엄 골딩의 바람이 담겨 있다. 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아이의 방식이다. ‘겁에 질려 있었어.’ ‘우연한 사고였어.’도 아이의 흔한 변명이다.        


어찌 된 노릇인지 요즘 대한민국의 ‘잭은 울지 않는다. ‘그저 놀이였다.’까지는 같다. 그런데 뒤에 이어지는 모양새가 다르다. ‘기억나지 않아요.’ 이 말은 소송을 염두하고 대응하는 어른의 방식이다. 참회보다 유·불 리가 먼저인 어른의 논리이다.  『파리대왕 2023』 속의 잭은 울지 않는다. 뿐만 아니다. 잭이 안경도 쓰고 소라도 들었을 테다. 그런 잭을 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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