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mmer Nov 04. 2023

Neither A(가부장) nor B(가녀장)

한국문학 읽고 쓰기 2

     

『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지음. 이야기장수 (2022)      


작가 이슬아는 1992년 서울 출생이다. 학자금 대출 이천오백만원을 갚기 위해 <일간 이슬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읽고는 싶은데, 책의 무게가 버거운 요즘 세대의 니즈를 관통했다. ‘A4용지 3장 분량의 글로 오늘 하루만큼의 포만감을 주는 전략’이 통했다. 하루치 글은 500원 정도에 살 수 있다. 그녀는 기자, 모델, 교사 등으로 일했지만, 글 쓰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반평생 다른 일을 하고 살다 중년에 등단해 대성하는 작가도 있다. 박완서나 주제 사라마구 같은 사람들. 그런 본투비 천재인 작가와 이슬아는 결이 다르다. 마감이 쓰고 피드백(그녀가 글을 발송하면 감상평 및 악평이 실시간으로 날아든다고 한다.)이 만들어낸 그녀의 글은 타고났다기보다 빚어진 재능에 가깝다.        


몇 년 전 김숙은 ‘가모장’캐릭터로 인기였다. 유행했던 가상 결혼 프로그램에서 가상의 남편 윤정수에게 돈은 내가 벌 테니 살림은 네가 하라며 호통 쳤다. 남녀 성 역할의 고정관념을 뒤집으며 만든 유가 통했다. 이슬아 작가의 『가녀장의 시대』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부모와 자녀의 역할을 뒤집는다. 성공한 작가 슬아는 출판사 대표되어 가녀장이 되고 모부母父를 고용한다. 부모(父母)의 순서를 뒤집어 표현한 모부(母父)는 이 글의 주제의식을 표현하는 핵심어이다. 고용된 모부는 근무시간 중 자녀인 슬아에 존댓말을 사용해야한다. 대표인 슬아는 집안 흡연이 가능하지만, 고용인 웅이는 집안에서 담배를 피울 수 없다.     


그녀의 모 복희의 주 업무는 살림노동이고 부 웅이는 청소 담당이다. 복희는 과거 시아버지, 시동생들과 함께 살며 11인분의 가사노동을 담당했던 베테랑 주부이다. 그러니 3인이 먹을 삼시세끼와 간식 준비 등 출판사 살림은 한결 쉽다. 무엇보다 가부장시대의 노동과 가녀장시대의 노동을 구분 짓는 것은 노동의 대가다.


시아버지가 통치하는 집안에서 밥 차리고 치우는 일은 가장 하찮은 일이었다. 끼니마다 복희를 입주 가사도우미처럼 쓰고도 십 년 넘게 임금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복희의 딸 슬아는 시아버지와 달랐다. 가사노동에 대한 비용을 복희 통장에 달마다 따박따박 이체하는 가장이다. (p.225)     


가족의 역할은 뒤집혔지만, 각자 느끼는 만족도는 꽤 높다. 슬아는 생계를 책임질 만큼의 돈을 글로 벌고 있다. 생계를 위한 글쓰기는 여타 노동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고되다. 그 고된 노동에 집중할 수 있는 건 복희와 웅이의 뒷받침 때문이다. 출판사가 아니였으면 복희와 웅이는 아마 건설노동현장이나, 24시간 감자탕 집 같은 험한 곳에서 일해야 했다. 출판사 일은 안전하고 쉽다. 또한 딸의 성공을 돕는 일이기에 뿌듯하다. 무엇보다 이들은 서로를 존경하고, 존중한다. 슬아의 모부는 그들의 부모들과는 달리 ‘권위 없음’을 실천한다. 딸의 미래를 묻지 않고, 딸이 데이트앱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것에도 잔소리 하지 않는다. 훈계나 가르침도 없다.      


우리 가정 또한 이러한 추세 속에 있다. 기존의 성 역할이 전복되고 있는 추세 말이다. 실제로 나의 남편은 아홉 살 아들의 전화기에 내 번호를 저장하고는 ‘우리집 가장’이라고 입력해놓았다. 늘 하는 말이다. “한 가정을 이끌기에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너가 더 적합해...” 썩 내키진 않지만, 일정부분 동의한다. 집안의 대소사에서 부동산계약, 재테크, 세금, 집안행사 등등 굵직한 일들로 골머리 썩는 건 나다. 치약이나 휴지 구매, 자동차 점검과 같은 비교적 단순한 일은 남편이 맡는다. 물론 우리집의 생계는 남편의 월급에 달려있다. 그러나 월급이 주는 권위는 없다. (어차피 반이상은 대출금으로 빠져나간다.) 나 또한 아이들 챙기고 삼시세끼 밥하는 복희의 역할에도 충실하다. 우리 집에 진짜 가장은 없다. 함께 사는데 필요한 역할을 자신의 능력과 성격, 취향 안에서 골라잡아 자기 몫을 다할 뿐이다.       


슬아는 매일같이 심신을 단련하여 힘을 키웠고 링 위에 올랐다. 가부장이라는 악습과 싸워 한판승을 거두었다. 부엌일에 정직원이라는 합당한 대우를 부여했고, 생계의 의무감에 눌린 가장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가녀장이라는 영광의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슬아는 그 타이틀을 뺏기지 않을 테다. 아무도 그녀에게 도전하지 않을 것이므로. 가녀장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할까? 내보기엔 가부장도 유행이 지났지만, 가녀장도 낡았다.      


부모는 백년을 살고 자식은 백이십년을 살고 손자는 백사십년을 사는 시대이다. 생각보다 우리는 오래 살아야한다. 인생은 마라톤이라고? 아니, 울트라 마라톤이다. 주행거리가 짧은 달리기는 주자들에게 서로 영향을 준다. 그러나 길어질수록 각개전투다. 자기와의 싸움이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우리가 겪는 많은 비극은 사회적 관계 속에 그러니까 결혼을 하거나 자녀를 낳는 또는 며느리나 사위를 맞이하며 생기는 관계 속에 고정된 역할과 위계를 기대하기 때문에 벌어진다.      


물론, 『가녀장의 시대』를 통해 얻은 교훈도 있다. 유머와 존중이 있는 가정은 참, 부럽다. 그런 가정은 박수 받아 마땅하다. 그렇기에 읽는 내내 따뜻했고 뭉클했다. 가볍고 편안했다. 오에 겐자부로와 주제 사라마구 사이에 읽어서 더 그랬다. 오에 겐자부로 만큼, 주제 사라마구 만큼 오래토록 읽혀지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수십 번 돌려 듣는 글쓰기 강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