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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Jun 21. 2024

썸머 생각 2 . 존재의 증명

두 명만 재미 있을 에세이

존재의 증명

 2019년은 14년간의 직장 생활 중 가장 피크였던 해로 기억한다. 인천이라는 낯선 도시로 발령받고, ‘일로 승부를 보자’ 까진 아니어도 ‘더 이상 일에 끌려다니지는 말자’ 다짐했다. 둘째까지 출산한 마당에 더 이상 후퇴는 없다는 심정을 가졌다.
 복직한 사무실에서 비슷한 포부를 가진 듯한 두 명의 동년배를 만났다. 신입 시절 같은 권역에서 일해 친분이 있던 한 살 언니 오과장과 두 해 선배지만 동갑인 김과장이다. 우리는 하루의 반은 업무에 매이고 나머지 반은 육아에 붙들려 기진맥진한 채 잠드는 30대 후반의 워킹맘이었다. 이 조합이 내게 남다르게 남겨진 이유가 있다. 우리는 모두 숨넘어갈 정도로 바쁜 일상 중에도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질문으로 괴로워했다. 비좁게 남은 공간에 자리 잡은 ‘나’라는 ‘존재 증명’에 대한 물음들이다.
 10년 차 직장인 기혼 여성의 자아 찾기란 생각보다 의미 없는 행위이다. 아이들 예방접종부터 양가 부모님 생신을 포함한 경조사 등 ‘반드시, 틀림없이,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 하는 일들로 To do list는 풀부킹 상태다. 네일아트를 받으며 생각을 비우거나 브런치를 먹으면서 한숨 돌리면 될 시간에도 모여 앉으면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내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나는 이렇게 살다 가는 거인가? 류의 답 없는 백일몽들. 그 속에는 제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소망이 담겨있으리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니 각자의 지향점이 조금씩 달랐다. 입사 초반부터 유명인이었던 김과장은 유명했던 이유인 고운 이목구비와는 달리 전투력 있는 내면을 가졌다. 그녀의 단기 목표는 ‘승진’. 일단 내가 속한 조직에서 높은 자리에 가고 보자는 심산이다. 우리 중 가장 현실적인 목표로 보이지만, 실제 조직의 상황으로 보자면 운에 맡겨진 영역이다. 인사과에서는 ‘올해는 객관적 사실 기반으로 평가 체계를 개편했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실제는 학생 때 수련회에서 몸풀기 게임으로 했던 엉덩이 싸움 같은 모양새다.
 오과장은 동글동글한 인상에 명랑한 성격으로 분위기를 잘 띄운다. 심각한 상황도 너스레로 넘기 줄 안다. 먹는 것 노는 것 좋아하는, 속 편한 여사님 같지만(남편이 꽤 튼튼한 회사 사장이다.) 의외의 이력이 있었다. 의사가 되고 싶어 수능을 몇 번이고 봤단다. 결국 맨 처음 안전빵으로 등록해 두었던, 적성에도 성격에도 맞지 않는 아동복지학과로 돌아가야 했다. 쓰린 마음에 낙방 후 몇 년간은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았단다. 아직도 그 꿈을 잊지 못하는 듯하다. 가끔 후원사를 다녀와 의사나 박사를 만나고 온 뒤면, 부러움이 담긴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런 그녀에게 우리는 “이제라도 다시 수능 준비하라.”고 놀려댔다.
 나, 조과장의 고민은 그들과는 조금 다른 결이다. 나는 퇴사를 꿈꿨다. 저들이 앞으로 전진 하고자 했다면, 나는 후퇴를 원했다. 막연하게 그저 나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회사를 그만둘 명분이 궁색했다. 아이를 돌봐주는 시부모님도 옆에 계시고, 돈도 더 벌어야 했다. 어쨌거나 무직이 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렇게 다른 지향점을 가졌지만, 일에 관해서는 꽁무니를 빼며 서로 미루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같았다. 서로 팔 걷어 올리고 나서는 스타일이라는 걸 알게 되니 시너지가 생겼다. 우리가 다닌 회사는 규모 있는 사회복지법인이다. ‘대한민국 사회복지의 역사와 함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유서도 깊다. 쉽게 NGO (Non-Governmental Organization)라 불리는데, 정확히 따져보면 NPO(Non-Profit Organization)다. 간단히 말해 국내외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들과 후원자를 연결하고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이행한다.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 재단에서 일한다고 하면 다들 부러워한다. 사람 좋은 사람들(사회복지사)이 모여서 하하호호 웃으며 평화롭고 마음 좋게 일하는 줄 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실상은 그리 꿈결은 아니었다. 아이들을 지원하는 사업부(우리는 복지라 부른다)와 돈을 모으는 모금부서가 나뉘어져 일하는데, 진보와 보수처럼 서로 다른 가치로 첨예하게 대립해 사무실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중소기업에서 일해본 사람들은 아시다시피, 일당백이다. 청소,운전,짐나르기 등 사소한 일부터 마케팅 기획부터 굵직한 행사 진행까지 꽤 전문 기술이 필요한 일들도 닥치면 해야 했다. 게다가 국내 굴지의 대기업 출신 회장님들이 성장에 방점을 찍어 대는 통에 실적 압박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는 대기업의 시스템과 임금은 없으면서 그 수준의 성과를 원한다고 투덜댔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누구와 일을 하느냐’가 성과와 만족도에 큰 영향을 준다.
 
 셋이 똘똘 뭉쳐 일한 한해였다. 그때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높고 험한 산은 개인 후원자를 모집하는 과제. 단발적인 도움보다는 아이들이 18세가 될 때까지 건강하게 자라 사회구성원으로 발 딛게 하는 것이 재단의 견고한 기조였고. 그를 위해 안정적인 후원금을 확보해야 했다. 기업이나 단체의 후원금은 대내외 환경에 쉽게 움직인다. 개인 후원자는 금액이 적더라도 오래 유지된다.
 어느 날 옆 권역 사업장에서 우리 지역인 강화도의 한 카페에서 캠페인을 해도 되겠냐고 물어왔다. 카페 주인의 허락을 받기 전에 혹시나 하여 연락했단다. 우리 셋은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느 사업장에서 모금하던 아이들에게 가는 후원금은 같은데도 실적 욕심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우리 셋은 하고 있던 일들을 제쳐두고 강화도로 무작정 떠났다.

 구름 한 점에 미세먼지마저 없던 4월의 하늘이다. 오랜 세월 거리에서 바깥바람을 맞은 캠페인 배너와 테이블, 수천 명의 가망 후원자들이 앉았다 일어났을 포장마차식 의자, 손때묻어 너덜너덜해진 캠페인 책자들은 낡고 허름했다. 그래서인지 시작부터 지쳐 보였다. 마치 우리 마음처럼. 거리 캠페인은 수백 번의 거절을 경험하는 일이다. 재단 로고로 전체가 래핑 된 구식 모닝에 재단 조끼를 입고 앉은 우리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무거웠다. 카페로 향하기 전 꽃집에 들러 프리지아 한 다발을 샀다. 평소 모객용 오퍼로 쓰던 색색깔의 팔찌 대신 꽃을 사용하기로 했다. 형형한 생기를 내뿜는 생화 한 다발 덕에 기분이 좋아졌다. 캠페인 물품에 베인 먼지 냄새 대신 프리지아의 향기를 맡으며 잠시나마 봄을 느끼며 기운을 냈다.
 카페는 인산인해였다. 강화도의 오래된 공장을 카페로 재개발한 곳인데, 어찌나 유명한지 패키지 여행의 한 코스로 자리 잡을 정도다. 형형색색의 등산복을 입고 무리 지어 관광하는 사람들 평균 연령은 5,60대. “오늘 쉽지 않겠는데?” 배테랑 오과장이 쓰윽 둘러보더니 한숨짓는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중년은 거리 캠페인 타켓으로 적당하지 않다. 그들이 기부에 인색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기부자 전체 통계에서 그들의 비중은 꽤 높다. 다만 그 연배의 어른들은 거리에서 만난 캠페이너의 설득으로 생각을 바꾸는 일이 없다. 애초에 의자에 앉지도 않는다. 가끔 저벅저벅 걸어와서 ‘원래부터 하려고 했는데, 오늘 만난 김에 신청한다.’며 설명도 듣지 않고 쓰는 분들이라면 몰라도.
 김 과장은 포기하지 않는 눈치다. 몇 년 전 그녀는 거리 캠페인에서 그야말로 귀인을 만났다. 유독 김과장의 설명에 귀 기울이고 버려진 아이의 사례에 눈물까지 보이던 젊은 청년이 지역의 유지였고, 그를 통해 엄청난 자선가들과 지역주민들이 재단의 후원자가 되었다.

 캠페인의 1차 목표는 일단 자리에 앉히는 것. 꽃을 들고 손님들이 드나드는 통로로 걸어가 보지만, 우리 쪽을 일부러 피해 걸어가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멀찌감치 서서 캠페인 테이블을 바라본다. 테이블용 현수막에는 [품;다]라는 단어가 큼직하게 박혀있다. 그 옆에는 무연고 아동 지원 캠페인이라는 작은 글씨도 보인다. 손에 든 브로슈어는 네모난 상자 모양으로 접혀 있고 한 페이지씩 열어보면 그 속에 갓 태어난 아이가 웅크린 채 찡그린다. 한해 300명의 아이들이 버려지고 있고, 우리는 그 아이들을 돕고 있다. 캠페인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연민과 동정심에 호소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니체는 타인을 연민하고 동정하는 건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에 전염되었기 때문이며, 그저 그 사람의 허약함을 드러내는 것뿐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그러나, 태어나자마자 세상에 버려진 아이들은 아무런 힘도 없다.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동물이다.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재단에서 일하며 수많은 사례를 통해 삶이 얼마나 불공평한지 눈으로 확인했다. 태어난 죄로 고통받는 아이들이 여전히 많다.
 사회복지에 대한 우리 인식은 계속 변해왔다. 빈민구제, 자선활동에서 인간다울 권리보장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했다. 누구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해결 방법은 없는지 깊이 들어가면 머리가 복잡하다. 생각이나 논의로 아이들의 배고픔과 필요를 채워주진 않는다. 복잡한 생각은 접어두고 아이들을 위해 대신 내가 목소리를 내는 거라고 동정심의 호소를, 의도적인 고통의 전염을 정당화해본다.  
 
 결국 그날 캠페인은 참담한 성적으로 마무리되었다. 3~4개 남짓한 신청서에는 카페 주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후 내내 우리 근처를 오가며 ‘잘되고 있냐’며 근심스레 묻더니, 끝날 때쯤 다가와 ‘볼펜 하나 달라’며 쿨하게 한 장 써주셨다. 사업장 한켠을 내주고도 마음이 쓰였을 주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남은 꽃 몇 송이를 건네고 패잔병으로 복귀했다.  
 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재단과 멀어져 있다. 김과장은 몇 년째 해외살이 중이고 오과장은 쌍둥이를 임신해 휴직 중이다. 그리고 나는 꿈에 그리던 백수가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여전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앞으로 뭘 하며 살 것인지, 어떤 적성을 개발해 볼 것인지 ‘나라는 존재 증명’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분투하지만, 딱히 답은 없다.
 사진첩 속에 담긴 4월의 그날 우리 모습은 누가 뭐래도 ‘제대로 살고 있는’ 모습이다. 물론, 그 해 함께 해낸 일 중에 성과로 줄 세우자면 최악의 날이다. 인사 평가서 앞줄을 차지할 수억의 전달식과 프로젝트에 비하면 그야말로 하찮은 하루였다. 그러나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는 존재의 증명이란 우리의 믿음과는 달리 실적이나 승진과는 무관하게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 받아들이며 묵묵히 서 있던 모습으로 말이다. 모든 사람이 청춘이 지난 후에야 자신의 젊음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알게 되듯, 우리가 찾고자 갈구하는 삶의 목적이나 의미는 시간이 흐른 후에야 선명해지는지도 모른다.



6년 전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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