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읽고쓰기23. 제임스조이스『더블린 사람들』을 읽고
제임스 조이스는 1882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 무렵까지는 더블린에서 살았지만, 곧 고향을 떠났고, 67세 생을 마감할 때까지 줄곧 타지에서 생활했다. 머나먼 타지에서 삶을 영위하였음에도 그는 고향 더블린과 그곳 사람들에게 천착했다. 15편의 짧은 단편을 묶을 수 있는 하나의 공통점은 배경이 더블린인 것뿐. 그렇기에 더블린이라는 도시가 가진 특수성이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자연스럽다. 그래서 아일랜드의 역사나 당시 더블린의 사회상을 찾아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책을 읽어 나갈수록, 19세기 초반의 아일랜드 사람들을 그린 것이 아니라, 어디에나 존재하는 인간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제임스 조이스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서울 사람들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같은 글을 만들어 냈을 것만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데이비드 호퍼가 그린 외롭고 고독한 뒷모습이나, 뭉크가 그린 불안한 얼굴들이 생각났는데, 그 작품들로부터 얻는 동일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한낱, 인간이라는 것.
가장 처음 수록된 「자매」에 등장하는 ‘마비(paralysis)’는 단어는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조이스는 이 글이 자신의 조국, 아일랜드 도덕 사(the moral history)의 한 챕터를 쓴 것이며 더블린은 마비의 중심지라고 언급한 바 있다. 후대의 많은 평론가와 학자들은 이렇게 해석했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 아래에 있던 아일랜드 사람들의 무기력하고 느린 삶. 우울하고 좌절에 빠져있는 상태를 마비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100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지난 21세기의 우리도 여전히 어딘가에 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구의 식민 지배를 받지도 않는데도 그렇다니, 이건 인간의 고질병인가 보다.
도대체 우리가 어디에 마비되어 있냐고? 사례는 차고 넘친다. 4년 전 이맘때쯤 우리는 코로나라는 공포에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그 당시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던 핫 이슈는 ‘S모교’. 난리법석이 있기 수년 전부터 과천의 이마트 건물 앞은 이 종교에 빠져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아들, 딸을 되찾기 위한 울음과 고함으로 가득했다. (종교 생태계에서 비즈니스를 중인 기성세대 신자들을 제외하고) 무엇이 창창한 젊은 청년들을 마비의 세계로 몰아넣었을까?
이보다 더 팽배하게 퍼져있는 기이한 일들도 있다. 학군지의 초등학생들이 선행 학습하는 모습들. 초등 저학년 아이가 미적분을 공부하는 건 특별한 사례도 아니다. 유치원생부터 의대 반을 준비한단다. 반면, 다 큰 아이의 약을 챙겨달라거나 용변 뒤처리를 부탁하는 학부모들 때문에 교사들은 죽을 지경이라니 참 아이러니다.
비극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이 마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고전을 읽기 전 내가 읽은 책들은 죄다 ‘삶을 갈아 넣어 성취하는 경제적 자유’에 대한 것이었다. 그 책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발견한 하나의 법칙을 이해하고 그대로 따르다 보면 성공할 수 있다고 부추겼다. 자기계발서로 포장된 배금주의에 속수무책으로 물들고 있다. 나만이 아니다.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라. 우리나라 현실이 그렇다. 이게 마비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사실, 제임스 조이스는 딱히 뭔가 깨닫게 하려고 이 글을 쓴 것 같진 않다. 그랬다면 더 감동적이거나 아름답게 썼을 거다. 그렇다면 그는 왜 썼을까? 그리고 왜 이렇게 썼을까? 어쨌거나 이렇게 아무 결말도, 서사도, 기승전결도 없이 포착된 장면들은 같은 이유로 무언가를 있게 한다. 교훈이든, 논쟁이든. 이게 도대체 뭐야 하는 탄식이든 말이다. 좀 더 그럴듯한 말로 하자면, 혹시 그게 바로 에피파니!? 에피파니를 발견했든 말든, 오늘 우리를 마비시키는 것들을 찾아내 보자. 그것이 이렇게 오래된 책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