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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인 Oct 2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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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풀 사랑

2017년 여름. 워터파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당시 내가 일하던 부서는 락커로 남녀가 함께 일할 수 없는 유일한 부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녀가 함께 일할 수 있는 몇몇 곳이 있었다. 실내락커룸 카운터와 야외에 단체손님 전용 락커룸 카운터가 그곳이었다. 당시 나는 갓 스무 살이었고 카운터는 매니저나 경력이 많은 혹은 나이가 있는 아르바이트생이 맡는 게 일반적이었고, 난 야외로만 배정을 받았기 때문에 카운터에 있을 일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왜인지 내가 야외 단체락커룸 카운터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더운 여름 뻘쭘히 둘이 앉아있기 뭐 해 건넨 말 한마디로 시작한 대화는 끊기질 않았고 교대를 하기 전 그는 내 번호를 물어봤다. 그런데 그 당시 나는 진짜 핸드폰이 고장이 나 수리를 맡긴 상태였고 이렇게 대답했다.


“아 제가 핸드폰이 없어서요…”


말을 뱉으며 2017년에 핸드폰이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생각했다. 후에 그는 이 말을 듣고 ‘아 이게 SNS에서만 보던 철벽인가?’라고 생각하며 상처를 받았다고 말해줬다. 그렇게 카운터 근무가 끝났고 우리는 지나가다 보면 인사는 하지만 조금은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수리를 맡긴 핸드폰을 받은 후 SNS를 하다 추천친구에 뜬 그에게 난 아무 생각 없이 팔로우를 걸었고 그에게 DM이 왔다.


- 핸드폰 없으시다며요…


나의 바보 같은 대답은 다행히도 하나의 연락거리가 되어주었고 우린 그렇게 연락을 주고받고, 일이 끝나면 함께 야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쉬는 날엔 같이 워터파크를 놀러 가는 사이로 발전했다. 매일같이 얼굴을 보고 같은 기숙사에 살고 함께 무더위에 일하다 보면 한 시즌에 정말 수많은 커플이 생겨난다. 우리끼린 그것을 ‘파도풀사랑’이라고 불렀다. 밀려오는 파도처럼 워터파크 시즌동안 뜨겁게(?) 사랑하다 부서지고 빠져나가는 파도처럼 시즌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며 헤어지는 커플들을 보며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우린 같은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그 해의 시즌이 끝나고도 만날 수 있었다.


나의 지난 연애들의 문제였던 연락문제는 그와의 연애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연애 초반 그는 나의 뜸한 연락에 고민을 많이 했다고 했다. 연락의 빈도는 마음에 비례한다고 하던데 처음엔 역시 자기를 아직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건가 생각이 들었단다. 그러다 찬찬히 나를 살펴보다 보니 중요한 것을 톡으로 물어보면 항상 답이 빠르고 카톡은 안하면서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 두 시간 세 시간을 통화를 하는 나를 보며 그는 나에게 왜 연락을 자주 안 하냐고 투정을 하는 대신 그것 역시 나의 스타일임을 받아들여 줬다. 연애 초, 학교 앞 술집에서 이 이야기를 하던 그의 모습을 보며 나조차도 모르는 나를 알아봐주고 좋아하고 이해해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스무 살의

나에겐 신기하면서도 참 따뜻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와의 연애는 참으로 안정적이었다. 그는 나에게 모든 것을 맞춰줬다. 가끔씩 불쑥불쑥 나오는 나의 투정과 짜증에 그는 한 번도 맞받아치지 않았다. 사람이 어떻게 그러지 싶을 정도로 내 앞에서 그는 그의 모든 성격을 뜯어고쳤다. 내가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한다고 하면 그는 내가 길바닥에 주저앉을 때까지 나를 데리고 돌아다녔다. 나는 대학 기숙사에 살고 그는 친구와 자취를 할 시절엔 내가 감기에 심하게 걸렸더니 친구에게 돈 10만 원을 쥐어 내보내고 그의 집에서 밤새 나를 간호해 준 적도 있었다. 내가 휴학을 하고 그는 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나를 만나러 나의 동네로 왕복 4시간의 거리를 매주 와주었다. 고작 서울-경기도 아닌가라고 가볍게 생각했던 난 처음 그의 동네를 놀러 갔을 때 꽤나 멀고 복잡한 경로에 혀를 휘둘렀고 그는 그런 나를 보며 자신이 대단하지 않냐며 뿌듯해했다. 내 생일날, 생일이 다 끝나가는 저녁까지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생일을 축하해주지 않아 슬퍼하던 날에 그는 하루종일 내 생일을 축하해 주며 맛있는 곳, 예쁜 곳을 찾아 데려가 기분을 풀어줬다. 게장이 갑자기 너무 먹고 싶어 하는 나를 위해 한 시간을 검색해 게장집에 데려가 줬고, 내가 독일로 떠나온 후에도 나의 엄마와 동생을 잘 챙겼다. 그는 내가 뭘 하든 항상 한숨은 쉴지언정 진심으로 응원해 줬다. 만나는 기간이 길어져도 그는 한결같았고 원래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그는 나에게 가장 친한 친구이자 남자친구이자 아빠였다. 그와 연애를 하며 느끼는 단 하나의 아쉬운 점은 우리가 너무 일찍 만났다는 것이었다. 이십 대 후반에만 만났어도 분명 결혼했을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내가 독일로 떠나온 후에도 약 2년 넘게 우리는 관계를 이어왔다. 떨어져 있었지만 매일매일 통화를 했고 그의 나를 향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았다. 더 이상 설레진 않았지만 그마저도 너무 안정적이고 편안한 관계 그것이 좋았다. 그러나 독일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마음은 나에게 그저 고맙기만 하지 않았다. 나는 독일에서 언제 돌아갈지도 모르고 내 미래는 너무나도 불투명한데 그가 한국에서 직장을 갖고 우리의 미래를 그리며 착실히 준비하며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점점 부담이 되었고 미안함도 커져갔다. 그리고 2022년 여름 그가 보내준 비행기 값으로 간 한국에서 우리는 이별을 했다. 어느 한쪽이 연인관계에서 잘못을 했다거나 마음이 떠난 것이 아니었다. 헤어짐에 대해 이야기하고도 일주일이 넘게, 내가 다시 독일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는 내 옆에 있었다.


독일에 돌아오고 서로의 삶에 새롭게 적응을 해가며 연락의 빈도는 차츰 줄어갔고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기 시작하며 우리는 정말로 헤어졌다. 마지막 통화에서 서로 새로운 사람과 만남을 한다는 것에 감정이 상해하지 않았다. 우리가 서로 너무 잘나서 이렇게 금방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는 거 아니겠냐며 웃었다. 그리고 마지막 통화에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사실 난 짜증도 많고 예민한 사람이야. 근데 너 만나면서 그걸 꾹 참아왔거든. 너한텐 그럴 수 있었어. 아마 죽을 때 내 몸에서 사리가 나온다면 그건 다 너 때문이야”


그저 다정한 사람인 줄 알았던 내가 너무 당연했던 그의 모습, 내가 느끼는 안정감과 편안함은 다 그의 몸에 사리가 생길 정도로 그가 나를 위해 꾹 참고 희생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라는 걸. 그제야 나는 느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온몸으로 그것을 느낀 것은 그의 마지막 말을 듣고 난 후였다. 그제야 난 내가 너무 가볍게 그의 사랑을 대한게 아닐까 하는 미안함이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철없고 불안정한 나를 사랑으로 채워준 사람이었다. 그에게서 나는 다정함을,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웠다. 사랑뿐 아니라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 따뜻함도 배웠다. 성인이 되고 처음 하게 된 제대로 된 연애가 그와 함께라 다행이었다. 진짜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나오는 행동이 이런 거구나 알게 해 준 사람이었고 처음으로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해 준 사람이었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날때 그가 겹쳐 보일 때가 있다. 그럴땐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왜냐면 그가 겹쳐 보인다는 건 새로운 그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니까. 그러니 그건 그가 남긴 따뜻함이다. 아주 소중한 따뜻함이다.


헤어진 연인의 행복을 빌어준다는 말을 누군가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도 그 외에 다른 전연인들은 다들 조그맣고 사소하게 불행했으면 하는 마음이 여전히 있다. 그러나 그 사람 만큼은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다. 좋은 인연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으면 한다. 그는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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