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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리 Sep 26. 2024

리멤버 미

부모의 쓸모에 대해

흩뿌려지는 기억들을 간신히 붙잡으며 살아가고 있다. 하루하루 해내야 할 미션들과 선명해진 뇌로 쏟아지는 자각들 때문에 정신이 없다. 어린 시절의 어떤 것은 지금도 선명한데, 어제 일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현재에 충실하려 하다 보니 잊히는 과거의 다짐들도 있다. 그럴 때면 그때와는 내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마치 생이 여러 개로 나눠진 것처럼 느껴진다. 잊힌 다짐들은 뒤로 하고, 새로운 다짐들을 지키려 노력하는 하루를 보내려고 노력하는 하루들을 보내고 있다.


그중 하나를 겨우 꺼내 보았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부터 마당이 있는 집에 가면 아이들과 신나게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하루살이에게는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다.


아들에게 잭슨 폴록 영상을 보여주고 액션 페인팅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바다는 물감을 흩뿌리고 손으로 쓸다 못해 캔버스에 얼굴을 갖다 대 입을 맞추는 듯한 가히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한술 더 떠 의기양양하게 “이런 게 예술이지!”라고 해서 나를 당황하게 했다. 미취학 아동은 당분간 액션 페인팅은 접어두어야겠다는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나라는 급기야 돌멩이를 주워 물감에 담갔다 캔버스에 붙였다. 나라의 그림은 항상 오브제로 마무리된다. 노래는 예전 미술 활동으로 물감이 조금 묻어 있던 흰 티에 잔뜩 물감을 튀기고 싶었는데, 미취학 아동 졸업 후에 급격히 좋아진 소근육 발달로 인해 옷이 하나도 더러워지지 않은 것에 실망했다. 하여 마지막으로 옷에 물감을 뿌리고 싶다 하여 그렇게 하라고 했다.


생각처럼 드라마틱하지는 않았던 시간이지만 가을이 가기 전에 아이들과 몇 번 더 그림을 더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정도면 최선을 다하는 것인지 최선을 다했다는 기억을 남겨주고 싶은 것인지 헷갈린다.

부모의 쓸모는 기억되어야 지켜지는 씁쓸한 것인 것인가.


얘들아 remember me.

오늘과 너희들의 자유로움과 정말이지 성큼 다가오는 바람에 조금은 놀랬던 가을 온도와 캔버스 위에 흩뿌려졌던 너희의 감각들을.


그리고 엄마도 좀 기억해 줄래. 왜냐면 생색내고 싶거든.

우리 서로 생색내면서 나중에 오늘을 즐겁게 기억하자.

그때까지 여기서 차곡차곡 예쁜 시간들을 잘 쌓아보자.


#ADHD극복기

#시골삼남매

#사랑은실패하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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