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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sanasu Mar 04. 2024

이겼으니 기뻐합니다

2024.3.3 vs. 충남아산 @수원월드컵경기장


축구를 기다리는 겨울은 야구를 기다리는 겨울보다 확실히 짧다. 3월인데도 매섭게 부는 바람 때문에 여전히 몸이 움추러든다. 따뜻한 봄을 기대하게 만드는 3월이기에 그 공기가 더 차갑게 느껴진다. 수원의 2024 시즌 개막전도 여느 해와는 다르게 더 가혹한 기분을 장착하게 만든다. 다름 아닌 2부 리그이기 때문이다. 어느 경기든 이기질 바라지 않았던 적이 없지만 이번에는 이긴다고 해도 왠지 모르게 그렇게 기쁠 것 같지가 않다. 무거운 기대감을 안고 빅버드를 방문한다.


추위와 무거움에도 불구하고 직관을 가는 결정에 대해서는 조금의 망설임이 없었다는 것이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작년의 참혹한 기분을 보상받고 싶은 심리도 있었을 테고 팀이 어려운 상황일 때 응원해줘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었으리라. 다들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까. 빅버드 주변에 산재한 수원팬들의 규모를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같은 슬픔을 가진 사람들 틈에 섞이고 싶은 욕구들이 있었다는 것을. 무거운 사람들이 모이니 그 무거움을 잊을 수 있었다. 수원의 팬으로서도 그렇게 뭉치는 방법 외엔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선수들이 몸을 풀러 나왔을 때 카즈키가 없다는 사실에 우울해졌다. 그러나 이미 이 팀은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팀이 아니라는 자각에 우울함을 접는다. 각자의 장점들이 동일한 주파수를 가지고 터져주기만 기대할 수밖에 없다. 뮬리치, 전진우, 이상민, 이종성, 장호익의 이름을 보니 전의가 타오른다. 새로 영입한 선수들은 아직은 잘 모르니 섣불리 언급하고 싶지 않다.


강등이라는 시련을 겪었기 때문에 뭔가 달라진 플레이를 기대했지만 사실 작년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찬스는 결정적이지 못했던 반면 상대의 공격은 매서웠다. 그러나 어차피 골을 넣어야 이기는 종목이기 때문에 21분에 뮬리치의 골이 터졌을 때 긍정적인 시선으로 돌아섰다. 상대 수비의 약간의 실수가 빌미가 되었지만 이상민의 정확한 크로스에 뮬리치의 논스톱 슈팅 과정은 완벽했다. 빅버드가 다시 흥분의 함성으로 들썩였다.


그러나 그 기분이 오래가지 않았다. 수원 수비수 조윤성이 퇴장을 당한다. 접촉이 있었던 건 맞지만 퇴장까지 줄 정도였는지는 애매했다. 어쨌든 판정을 번복할 수는 없었고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아산의 프리킥이 너무 정확했다. 공의 궤적을 보면서 먹혔구나 싶었는데 공은 골대를 맞고 다시 반대편 골대를 맞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우당탕탕하다가 위험 지역을 벗어난다.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전반 추가시간 막판 물리치가 프리킥 찬스를 얻었다. 그전 아산의 프리킥처럼 물리치가 찬 공의 궤적 또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키퍼의 손이 닿았기 때문에 골이 들어갔는지 불확실했는데 그물이 흔들렸고 뮬리치가 환호했다. 뮬리치의 멀티골. 무려 두골차로 앞서며 전반전을 마무리했다. 역시 2부 리그라서 개막전을 쉽게 이기는 건가, 하는 자만심이 잠시 형성됐다. 그러나 무거움을 놓치는 않았다. 언제나 사건은 후반에 일어나기에.


1부와 2부 리그가 구분이 되어있지만 실력차가 그다지 크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산을 상대로도 수원의 단점들은 여전히 드러났고 수원이 두려워하는 상대의 스타일을 아산도 가지고 있었다. 후반에도 수원은 공중볼 경합에서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고 단조로운 패스가 많았다. 아산 선수들의 개인 기량은 전혀 뒤처지지 않았고 스피드 있게 돌파하는 능력은 위협적이었다. 전체 경기를 돌아보면 아산의 점유율이나 유효슈팅도 아산이 더 많았다. 그런 통계적 우위는 결국 골로 이어진다. 후반 23분 개인 돌파에 의한 빠른 패스로 아산은 한 점을 따라붙었다.


익숙한 광경. 익숙해서 놀랍지도 않은 불안감이 몰려왔다. 항상 이런 식이었지. 저러다 동점 먹고 허탈하게 만들겠지. 두골차로 이기다가 동점이 됐었던 재작년의 인천전과 작년의 대전전이 떠올랐다. 2부 리그의 개막전에서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이건 너무 가혹하고 회복 불가능한 실망감을 안겨 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양형모의 침착함은 빛을 잃지 않았고 전진우는 코너지역에서 홀로 버티며 시간을 끌 줄도 알았다. 종료 휘슬이 울렸다. 2부 리그의 첫 승을 역사에 기록하는 순간.


일단 희망으로 시작한다. 경기가 끝난 후 SNS에는 여전히 조롱이 난무한다. 2부의 하위팀 이겨놓고 그렇게 기뻐하냐고. 누군가가 그에 응수한다. 이겼는데 슬퍼해야 하냐고. 둘 다 맞는 말인데 2부에 이미 내려온 팀에게 굳이 찾아와서 조롱하는 건 상당히 추한 짓이다. 수원팬이 과거에 비슷한 짓을 했었기에 보복성으로 그러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그 추함이 상쇄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추한 조롱도 이제는 별 타격이 없다. 우리 앞에 너무나 큰 숙제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다음 경기 원정석은 이미 매진이 됐다고 한다. 나는 가지 못하겠지만 그 분위기 상상하면서 집에서 응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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