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 1원의 돈을 쓰지 않고도 하루를 행복으로 가득 채울 수 있고 어쩌다 비용이 필요한 활동에 소비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금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퇴직 후나 가족의 병세, 자식을 위한 지원 등 미지의 필요 때문에 일을 멈추지 못할 뿐 나 하나만 생각한다면 지금 이 시간 모든 경제활동을 그만두고 나의 행복을 키우는 일에 남은 일생을 모조리 활용할 수 있다.
그 기준은 무엇인가. 얼마를 더 벌어야 하고 언제까지 일을 해야 하는가. 나의 희생으로 자신의 행복을 유지하는 사람들만이 그 기준을 가지고 있다. 확정된 금액이 아니다. 무한한 지속이다.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면 무얼 하며 살아갈 건지 묻는 친구의 질문에 이러저러한 일을 할 거라며 설명을 했더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없다며 나의 이상을 폄하했다. 나는 그 친구의 공감을 얻으려고 사는 인생이 아닌데 왜 그런 비합리의 말을 했는지 의아할 뿐이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일까. 정작 그는 나보다 재산이 월등히 많음에도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은 다 타협하게 되어 있다. 평생 자기 방식으로 살 것처럼 말했던 사람들도 하나씩 자기 것을 포기해 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물질에 대한 동경을 혐오하던 이도 물질세계의 맛을 안 뒤로 은근슬쩍 그 세계에 자신을 밀어 넣는 모양도 눈에 뜨인다. 이제 타협이라는 거친 말보다 적응이라는 말로 바꾸어야 할 테지. 유익한 것이 있으니 그리 행하는 것이다. 물질의 결핍으로 행동의 제약을 체험해 온 사람이 굳이 물질을 거부하며 살아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결국 그렇게 평범한 범주에 편입될 거면서 너무 자신을 믿었던 거 아닌가. 자신의 처지에 맞지도 않고 또 그것에 관한 대책이나 신념이 강하지도 않으면서 무작정 혐오부터 발설하는 인간들보다는 현실을 살아가는 개인에게 있어 물질의 중요성을 인지한 채로 때론 그 물질 속에 속박된 시간을 보내면서도 스스로 그 의존도를 낮추려는 시도를 감행하는 사람이 좀 더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