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세탁방에 눈이 내린다. 눈은 다른 곳에도 내리고 창문 밖으로 차는 달리고 나는 이불을 세탁기에 넣고 똥 마려움을 참는다. 어제는 떡볶이와 김말이 튀김을 먹었고 동화책을 조금 읽었다. 고향집 아버지의 정갈하지 않은 뒤통수를 생각했다. 우리 식구는 어릴 적부터 밥을 먹기 전에 양치하고 먹고 난 후에는 곧잘 까먹었지. 거기다가 믹스커피 드링킹이라니, 방귀를 뀔 때는 이불을 열지 않는다니. 근본 없는 집안인가. 다정이 넘치면 풀빵 냄새가 나는가. 이것은 고로 TMI(Too Much Information)인가.
필요한 말만 하고 사나요?
그런 것인가. 인간. 쓸데없는 말을 해버렸다. 아니. 애초부터 인간이란 존재가 TMI 아닐까.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행복해졌다가 난폭해지는 광장. 그 광장에서 온갖 주제를 고도로 큐레이션(콘텐츠를 목적에 따라 분류하고 배포하는 일)하는 전문가들을 추켜세우는 이천년대를 살며 생각한다. 넥플릭스 추천 영화를 관람하며 종종 딴생각하는 나는 정갈한 존재인가.
정갈함은 자본을 최대치로 생산해내는 사회에서 어떤 효력을 지니는가. 궁금하지 않은 소설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연애하고 정치하는 인간군상의 파노라마에서 당신은 홀로 득도할 수 있는가. 매일매일 미니멀 할 수 있는가. 정신의 제로웨이스트가 될 수 있는가. 별안간 모든 게 TMI로 보여서 그것 아닌 것과 그것 같은 것의 기준을 의심하기 시작했으니.
효용성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당신은 TMI 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일 년 동안 TMI 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현상금을 걸고 싶다(도통 감탄사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혼잣말은 할 것이다. 그것을 할 수밖에 없는 개연성을 모두 설명하다가 당신은 지칠 것이다.)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될 정보를 말하지 않는 자가 없다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고창 선운사. 여섯 음절의 소란으로 한 요일의 평화를 얻었다.
평화로울 것이다. 그리고 재미도 없어지겠지. 야담과 야사도 복권과 복덕방도 사라지겠지. 붕어빵의 오동통한 입술을 관찰하는 재간 없이 팥 고명 든 붕어를 퍽퍽하게 씹어먹겠지. 이랑이 말했듯이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를” 더이상 기다리지 않고 새 나라의 어린이가 되어서 비 내린 다음 날의 고양이 발바닥처럼 피곤하겠지.
매일 두 발이 젖어 있으면 쓰나. 잘 말려야지. 피곤하면 쓰나. 덜 피곤해지려면 바이트 낭비도 해야지. 그래서 모종의 귀여운 낭비를 해보기로 했다. 줄 세워 보기로 했다. 모두가 매일 뱉는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될 정보의 대표 명사들을. ㄱ부터 ㅎ까지 공기를 가르며 낭비하는 익숙한 바이트에 관하여 스리슬쩍 돌이켜보기로.
가령 ㄱ은 고해성사. 누군가는 누군가의 신부가 되어 죄를 사해준다. 상담자와 내원자, 톰과 제리 사이가 그러할 것이다. 서로 고해성사하듯이 설키고 얽혔다가 막 내린 후 각자 잘 먹고 잘 잔다. 여기서 고해성사란 비유적인 단어이며 고백을 듣는 이와 하는 이 사이― 티티카카 하며 발생하는 스파크를 돌이켜보자는 뜻이다.
ㄴ은 농담, ㄷ은 도돌이표 토크, ㄹ은 립서비스 등등… ‘모두의 TMI 사전’를 통해 스쳐 지나간 타인의 TMI 한 구절을 복기하는 일을 하고자 한다. 쓸모없는 우리의 대화 속에서 소거되는 맥락을 짚고자 한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고해성사를 곁들인 이야기를 짧게 열어 마무리하겠다.
나의 죄는 오일 솜사탕: 고해성사
신자라면 누구나 한 해에 두 번 이것을 해야 한다(실제로 이것을 하는 신자는 30퍼센트에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세 개의 문이 달린 고해소 한가운데 공간에 사제가 들어간다. 한쪽 공간에는 신자가 들어가는데 나머지 한쪽 공간에는 다른 신자가 대기한다. 신자가 고백을 시작하면 사제는 듣는다.
이때 신자는 자신의 죄를 상세하게 말해야 하는데, 가령 과일가게에서 바나나를 여러 번 훔쳤다고 말하는 데 그쳐선 안 된다. 다섯 번에 걸쳐 훔쳤다거나 그것이 황금바나나(?)였음을 고할 만큼 자신의 죄를 상세하게 말하는 것이 원칙이다. 자신이 저지른 죄가 율법의 어떤 계명을 어겼는지도 알려야 한다. 어쩌나. 신자는 피곤하다.
어쩌나. 사제는 더욱 피곤하다. 오죽했으면 일찍이 고해를 평균 4시간 이상 하는 신자를 피해 다니는 신부들도 있었다고 한다. 독일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는 한 신부에게 6시간 이상 고해성사를 했는데, 신부가 지친 나머지 욕설을 퍼부으며 고해소를 빠져나갔다고 한다. 그 뒤 자신의 스승인 요한 폰 슈타우피츠가 그의 고해성사를 맡았다고 하는데, 그의 귀는 과연 무사했을까(종교개혁 후 그는 제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관계를 청산한다).
그 시절 신부님의 귀는 과연 무사했을까. (출처_ https://i.pinimg.com/)
자신의 죄를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의 풍경을 떠올리면 우선 유리한 쪽은 말하는 사람일 것이다. 소시오패스가 아니라면 대부분 사람들이 경청하는 얼굴로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된다. 무게중심은 말하는 이에게 있는 듯하지만 고백이 끝나면 중심은 다른 곳으로 쏠린다. 듣는 사람이 그것을 곱씹는 과정이 생긴다. 몰랐던 그의 죄, 고민, 사정 같은 것들. 하지만 ‘뭐, 그렇군.’ 정도에서 대다수 끝난다. 대부분 자신이 앞으로 지을 죄와 자기 처지에 골몰하기 마련이니까.
죄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앞서 뱉은 이야기도 사라지지 않고 어떤 시간의 틈새에서 구전된다. ‘뭐, 그렇군.’ 식의 짤막한 감탄사가 여러 모양으로 배치되거나 유머 속에 섞인다. 하지만 무언가 있다. 사제는 자신의 죄를 고한 신자에게 사죄경을 읊는다.
“인자하신 천주 성부께서는 (중략) 몸소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용서합니다. 아멘.”
아멘. 자신의 죄를 알린 그 사람은 아주 약간의 평화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사나운 내 안의 죄가 가슴을 방망이질하고 있어서, 이 노래를 잠깐이나마 멈추고 싶은 마음. 듣는 자는 듣는 폭력을 견디며 인내심을 가지기 위해 용기를 냈을 것이다. 침을 몇 번이나 삼키고 공기를 가로질러 터놓는 고백의 목소리. 그리고 듣는 자의 노련한 기술은 ‘힘껏 듣지 않을 것.’ 종종 딴생각하며 리시브할 것.
자기보다 덩치 큰 톰을 곯려주려고 아침마다 큼지막한 세계로 나아가는 제리는 오늘도 신나게 업을 쌓으려 간다. 그 죄는 제리의 콧수염 하나를 뽑아보는 것. 제리 집 문간에 오늘도 누군가 서 있다. 어쩌면 고해성사는 오랜 오독의 습관일 수 있다. 너의 죄를 사하노니, 계속 털어놔도 돼요. 외롭지 않을 만큼만 귀담아들을 테니까. 네 옆에 방구요정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