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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뜰아이들 May 14. 2023

동문서답하는 마음

문식 04.  그래서 왜가리는 왜 어른이 돼서도 제 머릿속을 맴돌까요

어릴 적 살던 동네 우체국에 작은 서가가 있었다. 누군가 기증한 그림책, 백과사전 등이 한가득 꽂혀 있었는데 공공도서관을 알기 전엔 주로 거길 다녔다. 초등 중학년 무렵, 하교하고 할 일이 없어 들른 우체국 차창 밖으로 때마침 햇빛이 비쳤다. 바랜 페이지 위에 선문답하듯 이어진 활자가 마음에 훅 들어왔다.      


문학이란 피망이란 잘 모르지만 머릿속에 각인된 동시 한 편을 거기서 만났다. ‘읍니다’라는 문장이 빈번했던 걸 봐서 맞춤법이 개정되기 전에 출간된 동화책에 실린 작품인 듯하다. 외우기 쉬웠다. 하천을 걸으며 혹은 퇴근길에, 반려자가 잠든 심야 바깥에 나가 밤하늘을 보며 담배를 태울 때마다 떠올리곤 한다. 왜 자꾸 떠오르는지는, 나도 모른다.      




왜가리님

어데 가요

왜 혼자 가요

왜가리님 왜 말은 안 하고

대답만 해요

-박경종, 「왜가리」<조선중앙일보>(1935)     



최근 이 동시를 읽으면 명치 끝에서 따끈한 멍울이 계란찜 터지듯이 솟아오르는데, 갱년기는 아니다. 어쩔 땐 대답 잘하는 왜가리가 귀여워서 재밌고, 온통 ‘왝’소리만 지르는 왜가리에 빙의해 반려자를 위협해 보기도 한다. 위에 제시된 동시는 사실 원작이고, 이후 구전되다시피 한 버전은 ‘어디 가니’, ‘왜 혼자 가니’식의 현대어와 낮춤 표현으로 구성돼 있다. 어쨌든 왝왝거리는 녀석의 꾸준함이 다정하기도 하고, 별안간 질문을 연거푸 던지는 화자는 어떻게 생긴 녀석일까 상상하기도 했다.      


추정컨대, 어떤 질문을 하든지 ‘왝’이라는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왜가리 ‘있음’에 마음이 붙들렸던 것 같다. 존재의 현현과 같은 철학적 맥락으로 해석하고 싶지 않다. 다만 왜가리는 매사 ‘엉뚱한’ 답변을 하기보다 매사 상대방의 부름에 ‘인기척’을 내고 있었다는 것. 낼 수 있을 만큼의 목소리를 내며 ‘시방 나 여기 있어.’ 하는 의미로 곰곰 들리는 건 그래, 갱년기가 맞나 보다.      



#리듬이 있다

우리는 동문서답을 솔찮게(전남 지방의 방언으로, 꽤 많다는 뜻)하며 살아간다. 동쪽을 묻는데 서쪽을 말하는 현상에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지만,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의 ‘소통의 난항’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애초에 내가 정해둔 답변을 타인에게 듣길 원하며 질문하는 욕망을 우리는 심심찮게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가령 밥을 먹고 싶은지, 어디가 아픈 건지, 차기작은 무엇인지, 똥은 잘 쌌는지, 잘 지냈는지 등 판에 박힌 질문을 던진 후 색다른 답변을 기대하지 않는다. 예상외의 답변이 나오면 다음 어떻게 질문할지 재빨리 머리를 굴리는 수고를 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밥을 잘 먹었니?” 하면 “그럼요.”를 원하거나 “잘 지냈니?” 하면 “그럭저럭요.”, “잘 지냈어요.” 하는 답변을 떠올린다. 실제로 예상하는 질의응답이 오가면 일순간 대화의 흐름이 유순해진다. 동문서답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 고요의 연속이 과연 계속 편할지는 의문이지만.     


“어떤 질문을 하든지 ‘왝’이라는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왜가리 ‘있음’에 마음이 붙들렸던 것 같다.” (출처: https://pixabay.com)


그런데 말이다. 동쪽을 묻는데 서쪽을 답했을 때 보이는 리듬이 있다. 그건 살코기를 찢어놓은 모양새의 심장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게 한다. 웃기기도 하고 보지 않은 동전의 다른 면, 안간힘이 있을 수 있고, 정독을 위해 오독하는 몸부림이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응답하려는 몸부림, 해명하려는 몸부림으로부터 상대방을 알아채기 위한 질문은 가지가 되어 뻗어나간다. 사람의 표정과 안부는 그렇게 태어났던 것 같다.

     

손목이 아픈지 물었더니 허리까지 아프고, 책 보내주겠다고 말했더니 어딘가에 전화 좀 걸어달라는 사람에게 혼자 있는 방 안의 표정이 보일 듯하다. 들을 재간이 없는 사람이 뿜어내는 이야기의 조각은 다른 의미로 충분히 내가 당신의 말을 듣고 답하고 있음을 뜻한다. 동문서답은 너를 향해 이 순간을 버티고 살아있음을 이해하는 퍼즐이 되어 주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안는 법을 모른다. 동문서답하는 타인의 마음을 골똘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피곤한 일이니까. 갈피를 못 잡고, 회피하거나, 불가피한 생각들이 종종걸음으로 그의 곁에 머물다가 밥 먹으러 가는 참새처럼 소소해지길 바랄 뿐이다. 걱정과 외면을 계속하며 나 역시 누군가에게 동문서답을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매일이 언행 불일치의 생활이다.          



#내친 김에 같이 틀려먹은 이야기가 돼보기

질문보다 자기 말이 먼저 튀어나오는 사람을 만났을 때. 무아지경으로 엉뚱한 답을 하는 마음을 마주했을 때. 그가 서쪽을 말하면 서쪽을 같이 이야기하고 내친김에 북쪽도 말해 보기로 한다. 그땐 모든 동서남북이 존재하는 세계와 희극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동시 「왜가리」에 나오는 동문서답하는 주인공은 왜가리가 아니라, 그에게 말을 거는 화자일지도 모른다. 왜가리는 일정한 답변을 꾸준히 하지만 화자의 질문은 그의 답변에도 불구하고 몹시 끈질기게 이어지므로.  

      

조리도 없이 아귀에 들어맞지 않는 문답을 주고받는 왜가리와 화자의 풍경은 ‘내뱉어지는 발화 행위’에 가까운 ‘언言’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를 뜻하는 어語가 받치고 있는 세계는 언言으로, 둘이 모여야 비로소 언어가 된다는 건 왜가리가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하여 왜가리를 향한 궁금이 없을 때 왜가리의 음악도 동시에 사라질 것이다. 전화를 꼭 받아달라는 안부를 기억해야겠다.


괜한 말 했다며 이불킥하는 사람의 꿈이 골든골도 날리기를. 저도 모르게 무의식을 내뱉고 사과하는 사람의 저녁이 따뜻하기를 바란다. 사실 그때 당신의 혀는 다람쥐가 아침에 머리에 맞고 땅 밑으로 떨어뜨리지 않은 이슬과 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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