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리안 04. 분명한 이유
"범인은 이 안에 있어!"
한마디면 산장에서도, 학교에서도, 행사장에서도 범인을 찾는다. 꼭 찾는다.
범인을 찾는다는 건 '왜 이 지경이 됐는지, 분명한 원인'을 찾는다는 말이기도 하지.
나도 외치고 싶다, "범인은 이 안에 있어!"
이 찜찜한 기분은 무엇일까. 애초에 내가 무엇 때문에 지쳐 있는지 오늘따라 왜 이렇게 힘이 드는 건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찾고 싶다, 내가 이러는 이유.
범인을 찾습니다 01
능글맞고 장난스럽다는 말의 다른 표현은 '기분 나쁜 티를 내지 못한다'는 것일지도. 평소처럼 웃어넘긴 말에 찜찜함을 느끼곤 한다. 중요한 건 어떤 포인트에 찜찜한지, 잘 모르겠다는 것. 상대가 내가 싫어하는 사람도 아니고, 특별히 기분 나빠할 말도 아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는데. 나중에는 "나는 왜 능글맞은 거야!" 하며 나에게로 그 이유를 돌리곤 하는데, 애초에 나 스스로는 범인이 될 수 없다.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대전제 하에, 심지어 내가 범인일리는 없다는 확실성을 기반으로 출발한 질문이다.
범인을 찾습니다 02
가족과 식당에 갔다. 주문한 음식이 여러 개였는데, 뭐가 어떤 메뉴인지 말도 안 해주고 테이블에 올려줬다. 그중엔 다른 테이블에서 시킨 음식도 있었다. 이유가 분명해 보이는데, 스스로 납득이 안 되는 건 평소 같았으면 웃어넘길 일이라는 거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날씨 탓인지, 우주의 기운 탓인지, 나답지 못한 생각이나 행동이 욱! 하고 올라오는 순간들.
범인을 찾습니다 03
다른 사람과의 말을 능글맞게 받아치지도, 식당에서 메뉴가 잘못 나오지도 않았는데, 뭐 심지어 그날 업무가 많았던 것도 아닌데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 같은 기분. 나는 버스 타는 문어! 라는 생각으로 흐물흐물 집까지 흘러 들어간다. 그냥 피곤해서 그래. 그냥 피곤해도 이래? 생각의 꼬리를 물다가 시도 때도 없이 내가 피곤한 이유는 또 무엇인지에 대해 곰곰, 잠기는 하루.
범인을 찾습니다 04
뜨문뜨문 외롭다. 사람을 만나도, 영화를 봐도, 맛있는 걸 먹어도.
범인을 목격한 분은 연락 주세요.
P.S. 범인을 찾으면 나아질까?